그럴 수만 있다면 이 순간을 영원처럼 늘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비센테를 살짝 밀어내며 물었다.
“목 안 말라?”
“조금.”
그녀는 비센테를 등진 채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물잔을 집어 들었다. 바로 건네주지 않고 잔을 몇 번 가볍게 돌렸다. 깊은 생각에 빠진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같은 행동을 반복하듯….
문득, 그녀가 비센테를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까, 네가 물 가져다줬을 때… 그때 생각나더라.”
“…….”
“폰페라다 궁에서 네가 내게 차를 마셔 보라고 했었던 거, 기억해? 이렇게….”
그녀는 비센테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절뚝거리며 몸이 기우뚱 기울자, 그가 서둘러 다가와 그녀의 팔을 붙잡듯 안았다. 엘레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손을 뻗었다. 그의 입술을 들고 있던 물잔으로 살짝 눌렀다. 그가, 과거의 그녀에게 그랬었던 것처럼.
“마셔, 비센테.”
엘레나가 그때의 그처럼 종용하자, 비센테가 픽 웃으며 잔을 빼앗아 유리잔 속 물을 전부 삼켰다. 엘레나는 그 모습을 아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가 잔을 도로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다리가 공중으로 들리는데도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그녀는 비센테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대로 침실을 빠져나온 비센테는 응접실의 긴 카우치에 엘레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조금이라도 쉬어. 곧 사람들이 올 테니까.”
“같이 있어.”
엘레나는 비센테의 팔을 붙잡았다. 슬쩍 잡아당기는 힘인데도, 그는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의 곁에 바로 주저앉았다.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코라는 잘 지내지? 편지를 못 보낸 지 한참 되었는데.”
“루카스가 직접 보고받고 살피고 있어. 제 동생이 생각나서인지.”
“루카스 경이라면 믿을 수 있겠네.”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고 해. 네가 보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 줄 거야.”
이 와중에도 배려가 다정했다. 이미 몸이 바뀐 그녀가 브리타냐로 간다고 해도, 전과 같은 유대감을 유지하진 못할 테니까….
문득, 멀리서 첫 번째 종소리가 울렸다. 여섯 번 모두 울릴 때까지는 남은 시간이 조금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어릴 때 말이야. 둘이서 같이 찾아내고 다녔던 황궁의 비밀 방들, 기억나?”
“서너 개는.”
“사실, 그중에 네 아버지께서 내게만 알려 주신 곳이 있었어.”
“부황께서?”
“응…. 너에게도 말하지 말고 나만 알고 있으라고 하셨었는데. 네가 우린 평생 함께할 사이니까, 무엇도 비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었잖아. 그래서 네게도 알려줬고. 기억해?”
“그렇게 말하니까, 기억이 날 것도 같고. 그런데 그게 왜?”
“그냥, 여기 이러고 있으니까 갑자기 떠올라서…. 그 방에도 우리가 이렇게 긴 카우치를 가져다 뒀잖아.”
그는 실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픽 웃었다. 계속해서 울리는 종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게 좋은 듯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그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한 엘레나는 또 다른 과거를 끄집어냈다. 닥쳐올 날들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은 채, 과거의 추억이나 곱씹고 사는 노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때, 폰페라다 궁에서 있잖아.”
보다 직접적인 과거의 이야기에 비센테가 반성하듯 수그러들었다. 그녀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는 듯했다. 애초에 그가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이었다.
그가 ‘엘레나’에게 보였던 태도는 첩자에 대한 의심과 경계였고, 이후에도 한참은 그저 고용인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머리로 이해한 것과는 별개로, 그녀를 대하는 간극에 조금 놀랐던 기억은 여태 생생했다.
“비센테 네가 내 기억과 너무 달라져서, 처음에는 정말 놀랐어. 많이 야위어서….”
“…….”
“널 보고 나서야 내가 죽었다는 게, 그 뒤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는 게, 내가 ‘겪었다’고 생각했던 그 기억들이 착각이나 꿈이 아니었다는 게,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나더라.”
“…….”
“아, 특히 네가 같은 황족이 아닌 이상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고 했을 때 말이야.”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고자 덧붙인 말에, 그가 제 얼굴을 마른 손으로 연신 쓸었다. 커다란 손 사이로 드러난 귓가가 수치심으로 발갰다.
“면목이 없다. 내가 그때 정말… 미쳤었던 것 알아.”
“매번 내가 무어라 말만 하면 황족, 황족….”
“…네가 내 이름까지 부르면 정말 너라고 착각할 것만 같았어.”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부터 의심했었어?”
“너라고 바로 의심한 건 아니었고, 뭐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건….”
그는 말을 끝까지 맺지도 못했다. 이상함을 감지한 비센테의 눈매가 왈칵 일그러졌다. 갑자기 돋은 현기증에 그가 손바닥으로 제 관자놀이를 세게 짓눌렀다. 반대편 손을 뻗어 엘레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등을 따라 핏줄이 솟는 와중에도, 악력을 세밀하게 조절한 듯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엘레나. 잠시만… 내가, 지금….”
혼란스러운 듯 깜박이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엘레나는 천천히 쓰러지는 그의 몸을 제 품에 받았다.
“조금 쉬어, 비센테.”
“…이게, 대체….”
“미안해. 아까, 당신이 마실 물에 약을 조금 넣었어.”
“…그대.”
“당신이 나 때문에 죽지 않기를 바라. 나 때문에 무엇도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 우리가 겪은 것들을, 나눴던 대화들을 모두 잊지 않고 기억해 주길 바라. 당신이랑 의논도 하지 않고, 이렇게 마음대로 굴어서 미안해. 나는 정말, 어떻게 되어도 되니까….”
“…….”
“다만, 신께서 당신을 구하시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그녀를 간신히 붙잡고 있던 비센테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의식을 완전히 잃은 듯 축 늘어졌다. 그녀는 그의 상체를 아주 조심스럽게 카우치에 바로 눕혔다.
흐트러진 비센테의 금발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기고, 훤히 드러난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과 동시에 등 뒤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바깥의 서늘한 새벽 공기가 안으로 훅 끼쳐 들어왔다.
“황자 전하!”
익숙한 목소리들이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믿을 만한 두 사람을 보낸다더니, 단테와 루카스를 보낸 것이다.
“이벨린?”
얼핏 그녀를 알아본 단테가 반가운 낯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벨린’이라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얼핏 머리색과 눈색, 그리고 체형이 비슷하니까…. 영혼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나중에는 정말, 얼굴마저 조금씩 닮아 갔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