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을 조금 내리자 간밤엔 미처 보지 못했던 자잘한 흉터들이 그의 어깨며 옆구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말끔한 얼굴 탓에 정작 그가 군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지만, 벗을 몸을 보니 확연히 티가 났다.
엘레나는 그의 단단한 가슴팍과 매끄러운 근육으로 꽉 짜인 복부를 몰래 보고는 뺨을 붉혔다.
아침부터 지나치게 유해한 광경이었다.
“일어났어?”
그가 본능처럼 그녀의 허리를 꽉 붙잡아 제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어젯밤 그렇게 하고도…. 여전한 존재감에 엘레나는 조금쯤 아연해졌다. 겉으로는 저렇게나 단정하고 고귀한 얼굴을 하고서.
간밤 그녀를 끝까지 몰아붙이던 비센테는 그 위험한 낯은 대체 누구의 것이었는지.
하룻밤 새 기막힌 사기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억울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를 기어이 침대로 도로 끌어내린 그가, 그녀의 하얀 이마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몸은 좀 어때?”
“괜찮, 은데….”
“목이 쉬었네. 잠시만.”
어디 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그는 이불로 그녀를 돌돌 말았다. 그러고는 가뿐하게 일어서서 셔츠와 트라우저를 챙겨 입었다. 응접실로 나갔다가 이윽고 물 한 잔을 챙겨 들고 돌아왔다.
“마셔.”
물이 그득 고인 잔을 그녀의 입술 가까이 가져다 댔다. 네 연약한 손으로 어떻게 이렇게 가득 찬 물잔을 들게 하겠냐는 듯.
안 마셨다가는 숟가락으로 떠서라도 마시게 할 기세라, 그녀는 입술만 조금 축이고 밀어냈다. 물이 남은 잔을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비센테는 다시금 침대맡에 주저앉았다.
근사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짙은 후회가 묻어났다.
“정말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내가 잘못했다. 너 오늘 멀리 떠날 거 생각하면, 끝까지 참았어야 했는데….”
여기서 뭘 더 얼마나 참게. 간밤 그는 제 욕구를 제대로 충족하지도 못했다. 오로지 그녀에게 봉사하듯. 그 와중에도 혹시라도 아이를 가지면 어찌하느냐고, 중간에 약까지 챙겨 먹고 와서는….
어젯밤을 되짚느라 흐려졌던 엘레나의 눈이 다시금 또렷해졌다.
“그런데 그… 약은 어디서 얻었어?”
“카스트로가 보낸 시종들이 서랍마다 채워 넣었어. 하녀라도 임신시키면 피차 곤란하지 않겠느냐며, 조롱할 목적으로…. 물론, 평생 단 한 번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어.”
오해라도 할까 봐 곧장 덧붙이는 말에 그녀는 흐리게 웃었다. 굳이 그가 변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의 처음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어젯밤, 그 떨림을 봤으니까….
꿈을 꾸면서 그를 오래 지켜보았기 때문일까? 그녀는 비센테가 조금씩 당혹해하고, 헤매던 순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주 찰나였고, 그 뒤로 곧장 무서울 정도로 능숙해지긴 했지만.
“알아.”
“…왜?”
“응?”
“혹시, 부족한 부분이 있었어?”
비센테는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그녀가 간밤에 얼마나 흥분해서 울어 댔는지, 제 눈으로 보고도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그가 초조하게 마른세수를 했다. 반쯤 패닉에 빠진 채로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실제가 상상보다 압도적으로 좋아서… 내가, 실수를 저질렀나 봐. 어쩌지?”
“…….”
“미안해. 네가 부족하게 느끼는 줄, 정말 눈치채지 못해서. 이딴 것 하나 제대로 못 하고….”
그야, 부족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그의 앞섶을 틀어쥐고, 거의 그의 입을 막듯이 키스했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그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열고, 혀를 얽었다. 순식간에 깊어졌다. 등줄기를 쓰다듬는 손길에 그녀는 살짝 떨었다.
이젠 능숙함이 지나칠 정도였다. 입술을 뗄 때 그녀는 조금 헐떡였다.
“난… 좋았어. 어제도, 지금도. 정말, 더할 나위 없이.”
그가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제 입술과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고개를 돌렸다. 엘레나는 그의 귀 끝이 순식간에 붉어진 것을 보았다.
그녀를 지켜본 압도적인 세월로,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엘레나는 이제 완전히 동이 트기 시작한 창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옷을 입어야겠어….”
그녀는 그제야 제 몸이 깨끗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간밤, 시달린 끝에 기절해서 뭘 어떻게 할 시간도 없었는데….
아마도 비센테가 의식을 잃고 늘어진 그녀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 낸 모양이었다. 부끄러움에 발개진 그녀의 얼굴을 모른 척, 비센테는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체중이 실리자마자 발목이 욱신거렸다.
“…….”
그는 아주 지극한 손으로 그녀의 옷시중을 들었다. 발목에 부목을 덧대고, 하녀복을 다 갖춰 입고 나자 이윽고 해가 완전히 떠올랐다.
곧, 6시를 알리는 종이 칠 터였다.
“그런데 만약에….”
“응.”
“약이 소용이 없었으면 어떻게 해?”
그녀의 질문에 그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약을 먹고도 절정에 다다를 때마다 그가 주의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고, 이 질문은 정말 걱정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 의도였다.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
“비센테, 나는…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
이번만큼은 참기 힘들었던 듯, 비센테는 치밀었던 감정을 간신히 삼켜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굳은살 박인 엄지손가락이 피부를 쓸었다.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도.”
“…….”
“내가 이렇게까지 미련이 남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그야말로 할 수 있는 최선의 고백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가 슬펐다. 그녀는 그의 손을 붙잡고 손바닥에 제 입술을 가져다 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