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151)

“내일 황궁에서 나가고 나면 반드시 의사에게 보이도록 해. 이대로 두지 말고….”

“너는? 같이 가면 되잖아.”

“네가 벨몬테를 빠져나갈 때까지 시간을 끌 사람이 필요하니까.”

내가 사라졌다간 감시가 두 배로 심해질걸. 대수롭지도 않게 뱉어 내며 비센테는 웃었다.

“엔리케의 작전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어. 설득되지 않는 척 널 이쪽으로 부른 것도 그래서야. 어떻게든 와 줄 걸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내일 문이 열리면 기사들을 따라 나가도록 해. 나가서는 부디, 행복하게 살고.”

“…지금, 내 행복을 위해 죽겠다고?”

그녀는 망연한 얼굴로 되물었다. 온몸에서 핏기란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비센테. 당신, 내가… 정말 배신한 거였으면 어쩌려고 했어?”

“…….”

“엔리케에게 받은 가짜 정보가 아니라, 내가 진짜 정보를 넘겼다면? 카스트로와 있는 게 행복하다고 했으면?”

“…….”

“네가 이렇게 행동한 결과가… 그저, 개죽음에 불과했다면?”

마지막엔 패닉에 빠져 숨에 반쯤 먹힌 목소리였다. 불분명하게 뭉그러지는 음성을 용케 알아들은 그가 괜찮다는 양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힘주어 빼내려는 손을 기어이 붙잡아, 제 뺨에 가져다 댔다. 그대로 그녀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은 채 조금 웃었다.

그 웃음으로 제 기막힌 주장을 그녀가 납득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처럼.

“내 목숨을 네 혼수씩으로나 쓰면 값진 거지. 그러면 적어도 카스트로가 널 함부로 대할 리 없을 테니까.”

그녀는 헛웃음을 삼켰다. 터무니없는 시도인데도 작정하고 홀리려고 드니까, 순간은, 정말 그래서….

엘레나가 차마 대꾸할 말을 찾지도 못한 채 입술만 벙긋거리자 그가 덧붙였다.

“내게는 처음부터 대단한 대의가 없었어. 나는 성군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수를 위해 칼날을 갈아 왔어. 그렇게 살아왔어.”

“…….”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엘레나, 네가 내 곁에 있을 때뿐이야.”

“…….”

“네가 어떤 것에도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니까. 내가 네게 부끄러움으로 남지 않기를 바라니까….”

그녀는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부끄러워해? 너를? 성립조차 되지 않는 가정을, 개가 짖는 소리만도 안 되는 것을 진지하게 듣고 있자니 머리가 핑핑 돌았다.

대체 누가 널 부끄러워할 수가 있겠느냐고.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순간순간 널 열망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가지고 태어난 것과 네가 노력하여 얻어 낸 네 지위와 네게 자발적으로 충성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고….

“…아.”

그녀는 제 몸 상태도 잊은 채로 그의 멱살을 잡을 듯 덤벼들었다. 어깨를 붙잡고 체중으로 짓눌렀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그녀의 뜻대로 얌전히 몸을 뒤로 젖혀 주었다.

혹시라도 버텼다가 엘레나의 팔에 조금이라도 무리가 갈까 봐. 애초부터 그렇게 힘쓸 필요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야말로 짐승이 제 주인에게 복종하듯, 그 자그마한 손이 닿자마자 바로….

“…….”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진 비센테의 손목을 그녀가 도리어 붙잡았다. 애초에 그의 골격은 지나치게 장대했고, 그녀의 손은 그를 속박하기엔 턱도 없이 작았다.

그녀는 제 아래에 깔린 그를 바라보았다. 흘러내린 긴 갈색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드리워졌다. 그는 그녀의 체중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이윽고 잡혔던 손목을 빼낸 비센테는 왼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받쳤다.

엘레나가 그녀 자신의 체중을 견디고 있는 것조차 버거울까 봐. 자유로운 오른손으로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엘레나의 귀 뒤로 꼼꼼히 넘겨 주었다.

그녀는 비센테의 손가락에 제 뺨을 살짝 비볐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

“…아, 비센테.”

“그래, 엘레나.”

대답하는 음성이 달았다. 마치 언젠가의 꿈속 같았다. 그를 부르고, 그가 제 부름을 듣는 이 순간이….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그를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지금을, 단 하루뿐인 이 시간을 조금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

오늘은 끝나지 않고, 새벽은 영원히 밝아 오지 않으며, 그래서 두 번 다시 저 문이 열릴 리 없는 것처럼. 이토록 고요한 세상에 단둘이서만 남은 것처럼….

그녀는 이번에는 충동을 참지 않았다.

“안아 줘, 비센테. 네게… 안기고 싶어.”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던 청보라색 눈동자가 크게 트이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문득 아주 일그러진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제가 감히 그녀에게 더러운 욕망을 품을 수 있느냐고 묻는 것처럼.

“…지금은, 어떤 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녀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하듯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비센테가, 이윽고 그녀의 몸을 제 위로 무너트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제게 가져다 붙였다. 거의 그의 배 위로 주저앉는 자세였다.

팔꿈치로 상체를 받치고 몸을 일으킨 그가 그녀의 턱 끝을 매만졌다.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가칫한 입술을 쓸었다. 그의 숨결이 조금 떨리는 게 느껴졌다.

“…네 몸으로는, 버거울 텐데.”

“괜찮아. 네가 날 어떻게 대한다고 해도….”

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날 함부로 대한다고 해도, 누구보다도 다정할 것을 아니까. 그녀는 그의 손을 밀어내고 저 스스로 하녀복의 앞섶을 풀어 헤쳤다. 단추 몇 개를 풀기도 전에 양 손목이 절박하게 붙잡혔다.

풀어 헤쳐진 앞섶 사이로 보이는 하얀 가슴골로부터 그가 애써 시선을 돌리며 잇새를 악물었다.

“제발, 엘레나…. 네가 이러면, 정말 자제할 자신이 없어.”

“자제하지 않아도 돼.”

“…….”

“무엇도 참지 마. 내게 네 흔적을 남기고 싶어. 너를 힘껏 안고 싶어.”

“…….”

“아, 설마….”

그는 여전히 제 몸을 제대로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문득, 아주 가까스로, 어떤 한 가지 가설에 도달했다. 그녀는 제 헐벗은 몸을 내려다보았다.

카스트로에게 얼룩덜룩하도록 맞은 몸, 쇄골에 찍힌 반역자의 표식…. 하기야 어떤 남자도 이런 몸을 보고 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금세 의기소침해졌다.

“하긴… 이 몸으로는 아무래도 좀 그렇겠네. 이렇게 피부도 망가져서는, 얼룩덜룩하니까….”

“네 몸은 완벽해, 엘레나.”

비센테는 아주 가당치도 않은 소릴 들은 것처럼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어 냈다. 그가 그녀를 붙잡아 놓던 것도 잊고, 그녀의 양 뺨을 붙잡아 올렸다. 시선이 달게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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