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151)

그녀는 병사의 손에 붙들려 방 안으로 밀쳐졌다. 그녀가 카펫 위로 풀썩 쓰러지는 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병사는 느물거리는 웃음을 감추지도 않은 채 대충 고개를 숙였다. 인사는, 조롱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푸욱 쉬십시오, 황자 전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그녀는 일어서지 못한 채로 발목을 움켜잡았다. 안 그래도 부상으로 부실했던 발목이 넘어지면서 체중을 그대로 받아 충격이 컸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욱신거렸다. 그녀는 후드를 벗지도 못한 채로 소리 없이 고통을 삼켰다.

“…엘레나?”

웅크린 채 얼굴도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눈치챘는지. 빠르게 다가온 그가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그가, 당혹감에 숨을 들이쉬는 게 느껴졌다. 고작 그 접촉만으로 그녀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린 듯.

“너, 설마….”

뒤이어 목소리였다. 반쯤은 여전히 미심쩍어하면서도 기묘하게 확신에 찬.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은 큼직한 손이, 머뭇거림도 없이 후드를 젖혔다. 그의 청보라색 눈동자에 드문 경악이 어렸다.

비센테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웃을 수 있었다. 억지가 아니라, 진심으로.

“비센테.”

“너 그 몸은, 대체….”

“널 만나러 왔어. 널, 구하려고.”

그녀는 양팔을 벌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가 제 퉁퉁 부은 발목은 돌아보지도 않고 움직이자, 그가 그녀의 허리를 급히 받쳐 들었다. 커다란 손이 단단하게 그녀의 무게를 지탱했다.

엘레나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웃음과 울음을 터트렸다. 따듯했다.

“네가, 날 위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널 위해 죽음을 건너왔다고. 차마 입 밖으로는 내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떨림으로부터 비센테는 모든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제 등을 도닥이는 손길이 더없이 다정했다. 그래서 더 서러웠다.

비센테의 품에 이미 안겨 있는데도 그가 보고 싶었다. 이게 대체 무슨 바보 같은 심정인지…. 엘레나가 바쁘게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자,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에 그득 고인 눈물을 닦아 냈다.

뒤이어 눈가에 달래듯 그의 입술이 다정하게 닿았다.

“그래, 엘레나. 너라면 어떻게든 여기까지 오리라고 생각했어. 어떻게든 날 구하려고 들 거라고 생각했어.”

“아….”

“엔리케의 접선에 응하지 않으면 그가 널 찾아갈 거라고 생각했어. 어떻게든 내 앞에 밀어 넣겠다고.”

말을 거듭할수록, 그는 조금씩 제 죄를 깨닫는 얼굴이 되었다. 근사하다 못해 아름다운 얼굴이 처연하게 무너졌다.

“널 두고 감히 계산한 나를 용서해.”

용서라니, 계산이라니. 기가 막혔다. 계산을 했다면 그녀가 수백 번은 더 했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면 그의 노고를 잊어 먹기나 바빴던 그녀의 죄가 더 깊었다.

그런데 대체 누가, 누구를….

“내가 용서하고 말 것도 없어. 넌 처음부터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카스트로에게 투항한 것만 빼고는….”

이 와중에도 그의 잘못은 야무지게 지적하는 게 엘레나다웠다. 그러나 비센테는 조금도 웃지 못했다.

“나는 그저 확인하고 싶었어.”

“…….”

“네가 무사히 잘 있는지, 괜찮은지….”

이 와중에도 바쁘게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는지, 그가 기막힌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말문이 아주 막힌 모양이었다.

엘레나는 그제야 제 몸을 다시금 돌아보았다. 2년 전 그날에서 조금의 변화도 없는 몸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독을 먹고 뱉어 낸 피는 말끔하게 닦아져 있었고, 온몸에서 깨끗한 향유 냄새가 나는 것을 제외하면….

물론 그 시절에도 늘 깨끗하게 ‘관리’되기는 했었다. 언제든 황태자께서 불쾌감 없이 손을 올릴 수 있도록….

“네가 이렇게… 힘들게 올 줄 알았다면, 감히… 이러지 않았을 거야.”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울 것 같아서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다정함이 사무쳤다. 어떻게 몸을 되찾았는지보다, 대체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 몸을 되찾았는지를 걱정하고 아파하는 섬세함이.

어떻게, 너는 매번 날 이렇게도 구원하는지.

“…….”

그녀가 울 것처럼 인상을 일그러트리자, 그걸 뭐라고 해석했는지 그가 짧게 욕설을 짓씹었다. 여태 그녀가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스스로의 멍청함을 저주하듯.

그가 그녀를 훌쩍 안아 들고는 성큼성큼 침실로 걸어갔다.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데도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현실감이 그만큼 없기도 했고….

그가 그녀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퉁퉁 부은 발목을 떨리는 손으로 살짝 감쌌다.

정작 발목이 부러진 것은 그녀인데, 새파랗게 멍이 올라온 피부에 그는 어쩌지도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이런 몸으로 올 생각을 다 했어….”

그의 눈매가 아주 애달프고 애틋한 것을 보듯 일그러졌다. 비센테의 걱정은 조금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걷는 것 자체가 아프고 힘겹기는 했지만, 이렇게 가만히 놓아둘 땐 통증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워낙 방치된 지 오래된 상처이기도 했고….

지금에야 생소한 통증이지만, 그때 당시엔 걸을 때마다 아프지 않다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으니까. 그러니 정말, 별것도 아닌데.

“그렇게… 빤히 보니까, 조금 부끄러워.”

그녀는 제 치맛자락을 붙잡아 내리며 발목을 감췄다. 엘레나가 조금 불편한 내색을 하자마자, 그는 순순히 그녀의 발목에서 손을 떼어 냈다.

“보이기만 이렇게 보이는 거지, 생각보다 안 아파.”

그녀의 변명이 거듭될수록 비센테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군인인 그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부상과 상처를 수도 없이 목격했을 테니까. 말문이 막힌 것처럼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이윽고 막막한 숨을 터트렸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도 돼, 엘레나.”

“…….”

“너는 무엇도 참고 인내할 필요가 없어. 항상 네가 그렇게 살기를 바랐어. 가장 고귀한 위치에서, 좋은 것만 누리며 살기를 바랐어. 나는, 네가 그럴 수 있다고 믿어서….”

그는 차마 말을 다 끝맺지도 못한 채 잇새를 악물었다. 치밀어 오른 감정을 겨우 억누르는 것 같았다. 엘레나의 어깨에 얹어진 커다란 손은 그녀를 제대로 잡지도 못한 채였다. 제가 힘을 주면 그녀가 다치기라도 할까 무서운 것처럼.

그녀가 기억하는 한,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험하게 다룬 적이 없었다. 여태껏 그녀의 인생에서 가까웠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갉아 먹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정신이든, 육체든.

“…….”

꿈속의 비센테가 지금의 얼굴 위로 겹쳐 보였다. 그녀가 기억도 못 하는 세월을 끝도 없이 반복했던 그가. 수십 번은 스쳤을 손조차, 매번 아주 아까운 것을 잡듯 지극히 조심스러웠던 그가….

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 어떤 마음으로 그 지난한 세월을 버텨 냈을까? 애써 살려 놓아도 저는 그를 잊기나 바빴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조차 전하지 못했는데. 그의 인생에 아주 끔찍한 민폐를 끼치고도 뻔뻔하게도 몰랐는데.

정말이지 착해 빠져서는, 원망할 줄도 모르고. 한 번쯤은 함부로 대해도 시간이 돌이켜지면 무엇도 기억하지 못했을 텐데.

“당장 치료부터 받아야 한다는 걸 아는데, 지금은 내가 지금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해.”

“…그게 왜 네가, 미안할 일이야.”

멀쩡한 척 대꾸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서 소용없었다. 왜 네가 내게 사과해? 내게 네 인생에 끼친 악영향이 얼만데. 고작해야 날 조금 걷게 했다고, 그게 얼마나 대단한 잘못이라고. 애초에 네 잘못은 있지도 않은데….

엘레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건 정말 별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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