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151)
  • “…….”

    “한 번 열린 문은 곧 다시 닫혀. 그리고 반대쪽에서는 어떤 수를 써도 열리지 않아. 사람 셋이 겨우 지날 법한 좁은 길이 나올 거야. 그 길을 아주 오래 따라가면, 황궁 바깥으로 나갈 수 있어. 거기까지 나도 가 본 적은 없지만.”

    “…….”

    “내가 편지를 쓰라고 했던 주소, 기억하고 있지?”

    “응. 기억하고 있어.”

    “황궁을 나가면 우선 그쪽으로 가. 거기서 널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거야. 내일 불이 치솟으면 곧바로 움직여. 조금만 늦어도 위험해질 테니까….”

    아멜리아는 엘레나의 말에 꼼꼼히 귀를 기울였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은 반복적으로 질문했다.

    이윽고, 먼 곳에서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레나는 서둘러 후드를 뒤집어썼다.

    “이제 가 봐야겠다.”

    “그런데, 엘레나.”

    “응?”

    “E와 대화해 보기도 전에 이 모든 걸 미리 계획한 거야? 날 이쪽에 보내는 거나, 폭발이 일어나는 거나….”

    엘레나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너무 계산적인 것처럼 보였을까? 카스타야 후작이 그랬던 것처럼…. 엘레나는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미리 대비해 둔 거야. 감시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잖아. 그때가 너랑 이야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으니까.”

    아멜리아의 눈에 희미하게 감탄하는 기색이 어렸다.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부디 조심해, 엘레나. 언제나 널 위해 기도할게.”

    “무사히 다시 만나. 아멜리아.”

    인사는, 짧았다.

    ***

    후드를 뒤집어쓴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서쪽 탑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시녀에겐 관심이 없었다. 여자 하나가 탑에 들어갔다가, 다시 여자 하나가 도로 나왔다고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아멜리아보다 발을 살짝 절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절뚝거리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기사들의 이목을 특별히 피하거나, 지나치게 움츠러들지도 않았다. 일부러 길을 돌아가거나 고르지 않았다. 남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길을 이용하다가 들키면 도리어 더 수상쩍게 보일 테니까.

    그리고 그녀의 판단은 정확했다. 동관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걷는 게 좀 불편하냐고 물었던 병사 한 명뿐이었다.

    “여긴 통행 엄금 구역이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서자, 동관의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 둘이 창을 치켜들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의 뒤쪽으로 병사가 둘, 기사가 하나 더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기사는 ‘이벨린’의 얼굴을 아는 자였다.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는데도, 아는 얼굴을 보니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엘레나는 눈을 내리깔며 공손히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보내셨어요.”

    “…황태자 전하께서? 이름이 뭐지?”

    “데사예요. 여기, 황태자 궁 출입패예요.”

    병사들을 제치고 다가온 기사가 그녀의 손에서 작은 나무패를 받아 들었다. 앞면에는 황태자 궁의 복잡한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고, 뒷면에는 ‘데사’라는 이름이 성도 없이 박혀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나무패를 도로 돌려주며 말했다.

    “용건이 무엇인데.”

    한밤중에 하녀가 황자를 찾아야 할 이유로 ‘적당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엘레나는 부끄러운 것처럼 후드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크게 말씀드리기가, 곤란하여….”

    “용건을 말해.”

    “그러니까… 황자 전하의 마지막 밤을 위로해 드리라는… 명령을, 받아서….”

    병사들 사이에 헛웃음인지, 비웃음인지가 터져 나왔다.

    “이제 황족도 아닌 게, 꼴에….”

    내일 2황자의 재판이 끝나는 즉시 사형이 집행되리라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귀족 출신 사형수들의 사형 전 마지막 요구를 들어주는 관례가 있었고, 그들 중 ‘여자’를 요구하는 경우는 적지 않았다.

    그런 관점에서 엘레나의 ‘용건’은 흠잡을 곳 없이 적당했다. 그러나 기사는 어딘지 수상쩍다는 듯 그녀를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후드를 벗어 봐.”

    기사의 그 말을 들을 순간, 당혹스러움에 손끝까지 차가워졌다. 심장이 잠깐 멎었다가, 아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데사의 얼굴을 아는 사람인가? 아니면….

    “……!”

    그녀가 머뭇거리자, 기사가 손을 뻗어 그녀의 후드를 우악스럽게 젖혔다. 갑자기 확 드러난 얼굴에 엘레나는 부끄러운 듯 앞섶을 꼭 쥐며 고개를 숙였다.

    기사는 그녀의 얼굴을 위아래로 꼼꼼히 뜯어보고는 한쪽 입꼬리를 픽 올렸다.

    “아, 이래서….”

    “…무엇, 잘못되었을까요?”

    “아니다. 지나가 봐.”

    그녀는 후드를 다시 눌러 쓰고 절뚝거리며 그들 곁을 지나쳤다. 손끝이 조금 떨렸지만, 그걸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등 뒤에서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갈색 눈에 파란 눈이라니. 죽은 황태자비가 저렇게 생겼다죠?”

    “그렇다더라. 이번에 황태자가 끼고도는 브리타냐 여자도 저렇고, 저 하녀도 그렇고…. 눈색이나 머리색을 제외해도, 어딘지 처연한 분위기가 묘하게 닮았다고 해야 할지….”

    “취향 참….”

    “그래도 황태자 전하께서 일부러 닮은 계집을 찾아 내리신 거면 큰 호의를 베푸신 거 아닙니까?”

    “뭐, 이왕 죽을 사람이니 미련이나 풀고 가라는 거겠지.”

    엘레나는 아픈 발목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입구에서 나눈 대화가 안쪽까지 들린 모양인지, 복도에 서 있던 기사들이며 병사들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저속한 웃음과 눈빛도 함께….

    그녀는 병사의 안내를 받아 비센테가 갇혀 있는 3층의 문 앞에 섰다. 병사들은 그들끼리 암묵적인 신호를 주고받고는 두꺼운 목문을 열었다. 긴 전실이 나타났고, 중앙 문은 열려 있었다. 그 너머에 응접실이 보였다. 황궁답게 적당히 화려한 가구들이 갖춰진 공간이었다.

    카스트로가, 그에게 박하게 굴지 않았다더니….

    비센테는 창가를 내다보며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문이 열리든 말든, 누가 들어오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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