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적으로는 귀족원 의원의 어린 자녀들을 억류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도의적 질책이었으나, 결국 새롭게 에스페다의 황제가 될 카스트로의 권위를 꺾기 위한 알력 다툼이나 다름없었다.
고성이 오갔다. 교황은 자신이 카스트로의 대관식을 주관할 일은 없노라고 못을 박았고, 카스트로는 격분해 그 뒤에 서 있던 대주교 중 한 명을 끌어내 신의 대리인을 상징하는 면류관을 씌웠다. 오늘부터는 네가 교황이라는 희대의 망언과 함께.
‘그 가엾은 대주교는 정말 말 그대로 벌벌 떨었지….’
상황은 이처럼 시시각각 급변했고, 카스트로를 향한 비난 여론은 이제 위험 수위까지 차올랐다. 모든 게 정신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그들 모두에겐 다행스럽게도….
만약 비센테가 투항하지 않았다면, 카스트로는 조금 더 주의 깊게 움직였을 터였다. 여전히 황후를 공경하는 척하고, 비탈리 후작과 척을 지지도 않고, 귀족원의 자녀들을 억류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제가 언제든 대체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과거엔, 그 지저분한 야욕을 그나마 잘도 숨겼었으니까.
‘물론 이것도 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탁자 옆에 놓아두었던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곧, 아멜리아와 약속한 시간이었다.
‘침착해. 긴장하지 말고….’
그녀는 힐다의 목걸이를 목에서 풀었다. 체온으로 미지근해진 크리스털 병을 양손으로 꽉 잡았다. 처음 힐다에게서 받았을 때는 그저 파랗기만 했던 액체는, 이제 아주 어두운 곳에서도 저 스스로 희미한 빛을 뿜어냈다.
바로 지금이 힐다가 말했던 ‘필요한 순간’이었다. 이제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력이 깃든 거야. 내가 내 몸을 만졌던… 바로 그 순간에.’
그렇게 보면 카스트로의 말은 어느 부분에서는 옳았다. 몸을 만지자마자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몸’에 남아 있던 힘이 영혼이 다시 돌아올 길을 열어 준 것이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크리스털 병의 마개를 열었다.
“후….”
카스트로가 무언가 눈치챘다고 해도, 이런 방식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몸을 바꿔서 사람들의 감시를 따돌릴 거라고는.
협상이든 전략이든 계략이든 전술이든…. 결국, 상대보다 한 걸음만 앞서서 움직이면 언제나 우위를 점하게 된다. 상대가 똑똑하게 군다면, 아주 조금만 더 영악해지면 그만이었다.
엘레나는 눈을 꽉 감고 병 안의 액체를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
처음 느껴지는 감각은 희미했다. 무언가 숨통을 막듯이 위에서 전신을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디찬 물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감각이 둔하고 먹먹했다. 시야도, 후각도, 소리도…. 그러다 갑자기, 모든 자극들이 일시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콜록, 흐읍… 히윽….”
그녀는 밭은 숨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추위로 입술이 덜덜 떨렸다. 시야는 여전히 가물가물했지만, 후각은 곧바로 돌아왔다. 그녀는 눅눅하게 습기가 들어찬 지하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흡, 흐으….”
“맙소사.”
오른쪽 손으로 허공을 더듬거리자, 누군가의 손이 부축하듯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고통으로 잔신음을 뱉었다. 사람의 체온인 게 분명한데, 따듯하다 못해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뜨겁게 느껴졌다.
이윽고 그녀의 머리 위로 큼직한 담요가 덮어졌다.
“정말로, 이렇게 될 줄은….”
당혹한 듯 드문드문 이어지는 음성은 아멜리아의 것이었다. 아멜리아가 미리 준비해 온 탕파를 타월에 돌돌 감싸 품속에 안겨 주었다. 덕분에 체온이 아주 빠르게 돌아오고 있었다. 추위로 이빨이 딱딱 부딪치던 것도 점차 가라앉았다.
한동안 부산스럽게 담요를 추켜올려 주던 아멜리아와 시선이 정확하게 마주했다. 아멜리아는 말문이 막힌 듯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급작스럽게 눈물을 후드득 쏟아 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의 뺨과 어깨를 쓸었다. 울면서 동시에 웃었다.
“아… 이럴 시간 없는데, 그렇지? 여기, 네가 말했던 것들 준비해 뒀어.”
“고마워. 정말…. 모든 게 다….”
“서둘러. 이제 시간이 정말 없잖아.”
아멜리아의 말대로였다. 엘레나는 그녀의 부축을 받아 석관에서 바닥으로 내려섰다. 양발로 디디고 섰을 땐, 오른쪽 발목에 저릿한 통증이 일었다. 엘레나는 하마터면 돌바닥에 그대로 처박히듯 쓰러질 뻔했다.
“아… 으….”
아멜리아가 놀라 그녀를 부축했다.
“왜 그래?”
“발목… 부러졌다가,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었는데….”
통증은 순식간에 과거의 기억을 되살렸다. 그녀가 카스트로로부터 처음으로 도망치려 들었던 순간, 그녀의 발목으로 날아들었던 둔기의 잔상까지….
그때로부터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걸 보면 그 충격이 끔찍하긴 했었던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녀의 몸 상태였다. 그대로 시간이 흘렀다면 자연스럽게 통증은 전부 사라졌을 텐데, 시간이 멈췄었다고 하더니 정말 말 그대로 그 시절에 ‘고정’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죽던 그 순간, 그대로….
아멜리아가 아주 걱정스러운 얼굴로 무릎을 굽혔다. 퉁퉁 부은 발목을 가볍게 눌렀다. 엘레나는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너, 정말 이대로 괜찮겠어?”
“괜찮아. 아까는… 그냥, 잠깐 놀라서….”
그녀는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이렇게 아픈 줄 모르고 있다가 아픈 거라, 정말 놀라서 그랬어. 봐. 조금 절뚝거리긴 해도, 아예 못 걸을 정도도 아니고.”
“내가 정말 미치겠다. 널 이대로 어떻게 보내?”
“가야지. 어떻게든.”
엘레나는 멀쩡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보란 듯이 바닥에 놓인 바구니에서 옷을 꺼내 들었다. 아멜리아가 늘 입고 다니는 단출한 회색 드레스였다. 아멜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녀의 옷매무새를 직접 정돈해 주었다.
그러고는 바구니의 물품을 하나씩 설명했다.
“황태자 궁의 하녀에게서 출입패를 빌려왔어. 보이지? 여기, 데사라고 적힌 거….”
“응.”
“은퇴한 지 좀 된 하녀라고 하던데, 그래도 조심해.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가 부탁한 것도 여기, 넣어 두었어.”
“알겠어.”
“나갈 때는 혹시 모르니까 후드로 얼굴을 좀 가리고….”
바깥이 충분히 어두워진 데다가 엘레나는 말 그대로 아멜리아와 체형이 유독 흡사했다. 머리카락마저 아멜리아처럼 틀어 올리자, 어지간한 눈썰미로는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특히나 오늘처럼 달도 뜨지 않은 밤에는….
“그럼, 다녀올게. 이런 곳에 혼자 둬서 정말 미안해.”
“차라리 여기가 편해. 더는 황궁에 머물 자신도 없어. 담요도, 랜턴 기름도 충분히 가져왔고….”
그녀는 아멜리아의 손을 꽉 붙잡았다.
“잘 들어, 아멜리아. 내일 폭발음이 들릴 거야. 그러면 기사들이 자리를 비울 텐데, 그 틈을 타서 곧장 별궁으로 가. 지하로 내려가서 다섯 번째 방이야. 제단이 있는데 주변에 그걸 치울 수 있는 장치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