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지만, 전하께서 계획한 큰 틀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아시다시피 워낙, 신뢰도가 높으셔서요. 덕분에 사기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사령관도 자연스럽게 넘어가서 그분의 사촌이신 올리바레스 공작 영윤께서 받으셨고요.”
그래…. 국가적 영웅이시니, 그를 따르던 기사들이 그렇게 생각할 법했다. 비센테 정도 되는 사람이, 앞뒤 분간 없이 적진에 투항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더구나 엔리케가 보낸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의도는 확실했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찾아오기를.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계획대로 진행해도 지장이 없을 정도입니다. 사령관이 바뀌긴 했으나, 전하께서 떠나시기 전에도 워낙 철저하게 준비해 두셔서.”
“…….”
“그분의 목숨이 인질로 잡혀 있는 게 아니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벨몬테로 군을 집결시켰을 겁니다.”
엔리케는 비센테의 감시에 소홀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와 엔리케가 아는, 적어도 안다고 믿은 비센테는 이런 식으로 무모한 행동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었다.
차라리 이건 그녀의 방식에 가까웠다. 자기 파괴적이고, 앞만 보고 돌진하고, 스스로를 손에 쥔 유용한 패처럼 써 버리는 방식은….
그녀는 마른 손으로 피로한 얼굴을 짚었다.
“그래서 날 찾아왔군요. 내게 전하를 설득하는 걸 도와 달라고….”
엔리케는 침울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면목 없습니다, 정말….”
“군대는 어디까지 와 있어요?”
“외부에서 황궁으로 들어가는 소식은 우리가 완벽하게 차단했습니다. 우리 군은 폰테강의 상류부터 시작해 세 곳에 나누어 집결해 있습니다.”
“폰테강의 상류라면… 벨몬테는 3시간이면 함락당하겠군요.”
“문제는 우리의 ‘진짜’ 사령관께서 저 안에 계시다는 겁니다. 전하께서는 무조건 내일 동이 틀 무렵 궁에서 빠져나오셔야 합니다.”
“…제가 간다고 치고요. 접선은요? 언제 어떻게 해요?”
“내일 오전 6시에 내부 경비가 한 번 바뀔 겁니다. 동관을 지키는 인력의 절반이 재판장의 경비 병력을 지원 가기로 되어 있는데, 그때 잠시 내부가 빌 예정이라더군요. 그때 우리 측 인원이 대체하는 척 들어갈 겁니다.”
“…….”
“그들이 전하를 보필해서 비밀 통로로 빠져나가, 벨몬테 성곽에 다다르면 그 즉시 작전을 시작할 겁니다. 아가씨도 그때 함께 빠져나오시면 됩니다.”
빠져나오라고…. 이런 작전은 작은 규모로 움직이는 게 최선이었다. 비센테에 그를 호위할 사람들, 거기에 그녀까지. 차라리 남자 셋이 다니는 게 시선을 덜 끌 터였다.
“만약 제가 전하를 설득하는 것에 실패하면요?”
“설득이 불가하면 억지로라도 끌어내야 합니다. 귀족원이 우리를 지지할 명분이 필요해요. 그게 바로 저들이 올리바레스 공작 영윤을 경계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에겐 황가의 피가 고작해야 사 분의 일이 흐르니까….”
일단 알겠노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가까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다시 들어가요, 빨리.”
그녀는 다급하게 엔리케를 창고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아슬아슬하게 태피스트리를 내리자마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책상에 없는 것을 본 기사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그녀를 찾았다.
“…아가씨?”
“저 여기에 있어요.”
엘레나는 태연하게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그리고 서고에서 천천히 책 두 권을 뽑아 들고는, 가까이 다가온 기사를 향해 씩 웃어 주었다.
“봐요. 어디 가지 않고 얌전히 잘 있었잖아요.”
***
“오늘은 피곤해서… 들어가서 이만 쉬어야겠어요.”
“벌써? 그렇게 부실하게 먹고?”
카스트로의 지적에, 그녀는 음식 대부분이 남아 있는 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조각조각 난 채소 몇 종류를 제외하면 포크를 댄 흔적조차 없이 깨끗했다.
엘레나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와중에도 카스트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써 미소 지으며.
“입맛이 없어요. 몸이, 조금 피로해서 그런지….”
“갑자기? 왜?”
“아무래도 감기 기운인 것 같아요. 오늘 서고에서 조금 춥게 있었더니.”
“아하, 서고….”
“이만 물러가도 괜찮을까요?”
“그래. 가 봐.”
엘레나는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냅킨을 접어 포크 옆에 내려놓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는 동안 카스트로는 그녀를 집요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속이 메슥거렸다.
왠지, 카스트로가 무언가 알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에 자꾸만 초조해졌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방으로 돌아와서 하녀들에게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다. 따뜻한 물로 깨끗하게 씻은 엘레나는 향유를 듬뿍 바르고, 새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뒤엔 춥고 머리가 아프다며 약을 가져다 달라고 요청했다.
“몸이 안 좋으시면 황궁의를 불러드릴까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의사를 볼 정신은 없고, 그냥 잠이나 푹 자고 싶어서요. 비상시에 먹는 약이어도 괜찮아요.”
“아… 그런 거라면.”
하녀는 그녀의 말에 서둘러 방을 나섰다가, 잠시 뒤에 몇 가지 약병을 들고 돌아왔다. 이것은 두통에 좋고, 이것은 기침에 좋고, 이것은 잠을 푹 잘 수 있게 해 주고…. 침대맡의 테이블에 죽 늘어놓고 설명까지 꼼꼼하게 덧붙였다.
“한 번에 많이 드실 필요는 없고, 한 스푼씩만 드시면 된대요.”
“고마워요.”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네. 이제 없어요. 지금부터 아침까지 죽 잘 거니까, 중간에 방에 들어오더라도 내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움직여 줘요.”
“말씀대로 할게요. 그러면 쉬세요, 아가씨.”
이윽고 공손히 허리를 숙인 하녀가 침실의 문을 닫고 나섰다. 이윽고 응접실의 문까지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복도에서 하녀와 기사들이 몇 마디 의견을 주고받는 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렸다. 정확하게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긴장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마 내일이 비센테의 재판일이기 때문이겠지.’
온종일 황궁 내의 공기가 팽팽히 날이 서 있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카스트로는 대관식 준비로 며칠간 여념이 없었고, 황후는 제 궁에나 틀어박혀 바깥으로는 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스스로 나오지 않는 것인지, 카스트로가 막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황후의 그 같은 행보는 황태자가 제 어미의 가문을 버렸다는 소문을 가속시켰다.
비탈리라는 뒷배를 업고 선출된 현 교황은 카스트로를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