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151)
  • “잠깐만, 아멜리아.”

    “왜 그래?”

    “부탁 하나만 들어줘.”

    ***

    “이제 들어가셔도 됩니다.”

    서고의 내부를 꼼꼼하게 점검하고 나온 기사의 말에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주자 거대한 목문이 소리도 없이 밀렸다가 제 무게에 쏠려 다시 닫혔다.

    커튼을 모조리 걷어 두어 서고 안은 햇빛이 아주 잘 들었지만, 천장에 닿을 듯 올라간 서고가 빽빽하게 늘어서 어둑한 그림자가 도처에 있었다. 잘만 하면 사람 몇은 너끈히 숨을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다, 문득 입을 열었다.

    “경. 대체 어디까지 따라올 작정이세요?”

    “황태자 전하께서 아가씨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서고에서 책을 읽는 것도 편하게 못 하나요? 내부를 직접 확인하셨잖아요. 여긴 아무도 없어요. 제가 갑자기 사라질 리도 없고요.”

    “…….”

    그녀는 피로한 얼굴을 꾹꾹 문댔다. 카스트로가 그녀의 감시를 위해 붙인 기사는 완고하기로는 따라올 자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불행하게도 융통성마저 없었다.

    엘레나는 그에게서 몸을 휙 돌린 뒤, 가까이 있는 서고로 가서 책을 한 아름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 서고와 책상을 왕복하자, 책들이 산처럼 쌓였다. 그녀는 말없이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서 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책의 절반쯤 읽었을 때부터 꼿꼿하게 서 있던 기사의 자세가 다소 풀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지나자, 그는 밀려드는 잠을 어쩌지 못하겠다는 양 연신 하품을 해 댔다.

    엘레나는 읽던 책을 덮어 두고 고개를 들었다.

    “그것 봐요. 정말 여기 혼자 있어도 된다니까요.”

    “…….”

    “곁에서 그러시면 집중하는 데 방해가 돼요. 정 그러면 세수라도 하고 오세요. 어차피 문밖에는 시종이 지키고 있으니 도망갈 수도 없잖아요.”

    “…알겠습니다.”

    그녀의 채근에 기사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도서관의 내부를 슥 훑어보고는 목문을 닫고 나갔다. 황궁의 3층은 다른 건물의 5층쯤은 족히 되기에, 창문을 통해 침입하거나 빠져나갈 수 없다는 판단이 선 모양이었다.

    그것도 엘레나처럼 펜대에도 휘청거릴 것처럼 생긴 사람이라면, 더더욱.

    “…….”

    그녀는 바깥의 동태에 귀를 기울이다가, 재빨리 일어서서 서고 쪽으로 향했다. 기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수도관은 궁의 1층에 배치되어 있었다. 운이 좋다면 20분쯤, 기사의 걸음이 빠르다면 15분쯤이면 돌아올 터였다.

    그녀는 서고의 오른쪽 벽에 걸려 있는 태피스트리를 걷어 올렸다. 그 뒤로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좁은 창고였고, 그 안에 엔리케가 있었다.

    갑자기 쏟아진 햇빛에 눈이 부신 듯 그가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시간 없으니 당장 용건부터 말해요.”

    엔리케는 대뜸 얼굴로 쏟아진 말에도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동관의 경비 인력을 뚫을 방법이 없겠습니까? 비센테 전하를 감시하는 기사들이 전부 황태자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매수가 불가능한가요? 한 사람도?”

    “쉽지 않습니다. 동관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오래도록 비탈리에 충성한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그들과 친분이 있는 자들입니다. 경비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녀는 곰곰이 몇몇 얼굴들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황태자 궁의 하녀들도 모두 황태자 전하의 사람들이라. 저도 감시받는 실정이에요.”

    그녀나 시녀들의 입김이 통하는 하녀들이 있던 것도 벌써 2년 전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카스타야 후작의 반역 사건에 휘말려 대부분 황궁에서 같이 쓸려 나갔다. 만약 남아 있다고 해도, ‘이벨린’의 몸으로는 이용할 수 없는 인력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정말 답이 없습니다. 황궁의 각 문마다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어 몰래 빠져나가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

    “편지를 보니까 탈출로의 위치를 알아내셨다고요.”

    “황족들이 위급 시에 황궁을 빠져나갈 때에만 쓰는 거예요. 역사상 여태껏 실제로 쓰인 적은 없다고 들었어요. 길이 좁은 데다 험하다고 들어서….”

    그녀는 말을 멈췄다가, 엔리케의 표정이 이상해지기 전에 재빨리 덧붙였다.

    “물론, 비센테 전하께서도 알 거예요. 제게 그 통로에 대해 알려 주신 게 비센테 전하시니까.”

    따지자면 거짓은 아니었다. 황궁에는 황제에게서 황태자에게로 구전되는 몇 개의 비밀 통로와 공간들이 있었다. 기록해서는 안 되고 말로만 전해져야 하는 특성 때문에 하나둘 기억에서 잊히는 와중에도 몇 개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이 탈출로는 바로 그 살아남은 비밀 통로 중 하나였다. 어린 비센테가 엘레나에게만 몰래 공유해 주었던….

    어쨌든, 이 탈출로를 이용한다면 들킬 확률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문제는 어떻게 비센테를 빼 오냐는 것인데.

    “만약 어떻게 접촉한다고 하면요? 황태자 궁의 하녀복을 우리 측 여자에게 입혀서 보내면, 전하에게 말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문제가 바로 그겁니다.”

    엔리케가 드물게도 자신 없는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슨.”

    “사실, 전하께서… 접선을 거부하고 계십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넋이 나갔다가 아주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 측 첩자들을 모조리 들킬 각오를 하고 몇 번 접촉을 시도해 봤는데, 탈출 의지가 전혀 없으십니다. 덕분에 경계심을 사서 경비 인력만 모두 바뀌었….”

    “제정신이에요? 대체…! 나한테 했던 말과 다르잖아요. 제가 황태자에게 투항하면, 전하께서 군대를 이끌고 올 거라고 했으면서!”

    한껏 경악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바깥으로 소리가 새 나가지 않도록 목소릴 죽였다. 엔리케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이렇게까지 행동하실 줄은, 저도 정말로….”

    엘레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고, 고함이라도 고래고래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

    그러나 일은 이미 저질러졌고 이제 와서 잘잘못을 따져 봐야 소용없었다. 그녀는 잠잠히 수그러들었던 고개를 번뜩 들었다.

    “전하를 따르던 기사나 귀족들은요? 이 사실을 아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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