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5/151)
  • “아마도. 모든 죄를 자기가 다 뒤집어쓰겠다더군. 제법 협조적인 태도라 서쪽 탑이나 지하 감옥이 아닌, 동관에 가두어 두었어. 일주일 뒤면 재판이 열려. 사형이 선고될 테고.”

    사형 선고, 일주일. 그렇다면 그는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카스트로의 옷자락을 흠뻑 적신 피의 주인은 적어도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러면, 대체 누구의 피지?

    저도 모르게 벌렸던 입을 다물자, 카스트로가 손을 뻗어 그녀의 입매를 아무렇게나 만졌다.

    “웃어.”

    “…….”

    “네가 원했던 대로 된 거잖아, 엘레나.”

    그녀는 카스트로의 무례한 손에도 가까스로 미소 지었다.

    “…다행이네요.”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입술을 카스트로가 엄지손가락으로 몇 차례 쓸었다.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툭 내뱉었다.

    “비센테의 사형 직후 대관식이 열릴 예정이야. 그때까지는 네 몸을 되찾았으면 좋겠군. 그날 황후 책봉식까지 한 번에 해치우면 좋을 테니까.”

    “아,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황태자 궁의 서고나 전하의 집무실은 자료가 너무 부족해요. 적어도 본궁 도서관까지는 돌아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솔직히 감시당하는 건 좀 서운해요. 이해도 잘 안 되고요. 제가 전하를 배신할 것 같나요?”

    그가 코웃음을 쳤다.

    “모르지. 네가 비센테의 탈출을 돕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하지?”

    “…그럴 작정이었으면 처음부터 전하를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난 그저 모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두는 거야, 엘레나.”

    “…….”

    “원하는 책이 있다면 기사를 시켜. 그 외엔 얌전히 네 방에 박혀 있고. 재판이 끝나고, 비센테의 사형이 이뤄지는 즉시 풀어 줄 테니까.”

    그는 엘레나를 제게서 슬쩍 밀어내며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짚었다. 유독 가라앉은 기색이었다.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던 제 아비가 죽고, 비센테마저 억류해 두었으니 당연히 기뻐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전하 말씀대로 할게요. 대신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말해.”

    “황후 폐하의 시녀인 아멜리아를 다시 제 시녀로 두고 싶어요.”

    “…….”

    “한때, 자매처럼 지냈던 사이라…. 곁에서 절 많이 도와주었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바깥이 시끄러우니 너무 무서워서….”

    엘레나는 긴장을 감추려 치맛자락을 꽉 잡았다. 설득되었을까? 그가 수상하게 여기지는 않을까? 저 지독하게 집착적인 성미를 생각하면, 도리어 둘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느냐고 득달같이 달려들 여지도 있었다.

    그녀는 제 앞섶에 양손을 포개 올렸다.

    “그게 힘들다면, 가끔 들르는 건 허락해 주세요. 얼굴이라도 볼 수 있게.”

    유순한 얼굴은 어떤 꿍꿍이도 없이 그저 간절해 보였다. 이윽고, 허락이 떨어졌다.

    “…시종장에게 말해 두지.”

    ***

    “쉿.”

    문을 열고 아멜리아가 들어오자마자, 엘레나는 그녀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곧장 손목을 붙잡고 침실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섰다. 문의 바깥에는 황태자의 직속 기사단과 시종들이 몇 겹으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지난 닷새 동안 드나드는 하녀 한 명, 사소한 물품 하나에 이르기조차 엄중한 감시의 시선이 뒤따랐다. 그들이 대화하는 사소한 잡담 하나까지도 황태자에게 보고할 심산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

    엘레나는 침실과 응접실 사이의 중문까지 꼼꼼하게 닫고 나서야 겨우 안도했다. 사흘 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반가움의 해후를 나눌 시간도 촉박했다.

    “하녀에게 답장은 받았어? 뭐라고 해?”

    “우선은 그쪽에서 너와 한 번 이야길 나눠 보고 싶어 하더라. 장소와 시간을 알려 주면, 어떻게든 맞춰 보겠다고 했어.”

    “네 탈출로는 확보했다고 해?”

    아멜리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어. 널 다시 보기까지 시간이 걸려서…. 어떻게든 연락을 취할 방법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엘레나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침실 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여기에 갇힌 닷새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시시각각 비센테의 재판일이 다가오는 와중에도,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은 아무것도 못 한 채로 이렇게 시간만 죽이는 꼴이라니.

    엘레나는 오래된 버릇대로 입술을 짓씹었다.

    “일단 난 황태자 궁 바깥으로는 나갈 수 없어. 감시가 아주 지독해서…. 시간은 언제든 상관없다고 해?”

    “응. 일단 그렇게 적혀 있긴 했어.”

    그녀는 길지 않게 고민했다. 생각을 거듭해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러면 황태자 궁의 서고에서 만나는 게 최선이겠어. 시간은 내일 오후 3시부터 5시 사이에…. 거기 몸을 숨길 만한 공간이 있거든.”

    엘레나는 몇 가지 가능성에 대해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덧붙였다.

    “3층이니까 감시가 그렇게 심하진 않을 거야. 경비를 뚫고 들어올 수만 있다면…. 미리 와서 숨어 있으면 내가 어떻게든 기사를 따돌려 볼게.”

    “그렇게 전해 둘게. 위험할 것 같으면 무리하지 마, 엘레나.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아멜리아의 말은, 그저 불안감을 달래기 위한 거짓 위로에 불과했다. 황후는 물론이고, 이제는 카스트로의 감시마저 받는 처지에 눈에 띄는 행동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그녀는 불현듯 불안해져서 물었다.

    “말은 어떻게 전달하기로 했어? 네가 접촉하는 사람들은 이제 모조리 감시 중일 텐데….”

    “약속한 방법이 있어. 쪽지를 숨겨 두면 그쪽이 알아서 회수해 가겠대. 벌써 황궁 안에 잠입한 사람이 있는 것 같아. 매수했거나.”

    잠입한 사람이 있다면 단테나 루카스는 아닐 터였다. 그들은 이미 너무 얼굴이 많이 팔렸으니까. 그렇다면, 엔리케가 직접 왔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단테나 루카스라면 실질적인 도움을 줄 가능성이 컸지만, 엔리케라면 그녀에게 무엇이라도 받아 내려고 들 터였다. 정보나 인맥, 하다못해 지극히 사소한 도움이라도. 그 책사는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는 법이 없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엄중한 감시를 당하는 와중에 대체 어떻게 그를 돕지?

    만나자고 하니 일단은 만나 보겠지만, 접촉한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몸이 두 개가 아니고서야….

    “어쨌든, 조심해. 엘레나.”

    아멜리아가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마지막 당부를 건넸다. 벌써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것보다 더 오래 머물면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면, 의심을 살지도 몰랐다. 엘레나는 서둘러 방을 떠날 채비를 하는 아멜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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