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151)
  • “이미 제가 황제입니다. 저 말고 다른 계승권자는 모두 죽었거나, 곧 죽을 예정입니다.”

    “황가의 피를 이은 귀족들은? 네게 딸자식을 잃고 앙심을 품을 부모들은? 그들 모두를 죽일 작정이냐?”

    내내 소리 없이 이죽거리고 있던 카스트로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황좌에서 내려온 카스트로가 천천히 황후의 앞에 섰다.

    이제 제 아들의 얼굴을 아주 생경한 것처럼 쳐다보는 것은 황후였다. 고작해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제 치맛자락이나 붙잡고 애정을 갈구하던 아들이었다. 그가 달라졌다기보다는, 그가 앉은 자리가 달라졌다.

    실체도 없는 권력이 카스트로의 말과 행동에 힘을 실었다. 아직 대관식을 치르기도 전인데도.

    문득, 접견실의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음성들이 들렸다. 그녀는 흠칫 몸을 뒤로 물렸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이냐?”

    “아, 별것 아닙니다. 궁에 불온한 무리가 있어서요. 그들의 가족을 붙잡았습니다.”

    “…뭐?”

    “귀족원의 절반이 저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협상해야만 하는 패를 틀어쥐면 될 일이 아닙니까? 적당한 인질이면 충분히 좋은 패고요.”

    “카스트로!”

    새된 음성이 높은 접견실의 천장을 울렸다. 카스트로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대꾸했다.

    “말이 인질이지 아주 형편없이 대우하려는 게 아닙니다. 일주일 뒤에 있을 대관식 때까지는 누구도 황궁을 나갈 수 없겠지만.”

    “너… 지금, 금언을….”

    가브리엘라는 숨을 몰아쉬었다. 아들의 옷자락을 덜컥 구겨 쥔 손이 발작적으로 떨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귀족원을 건드려?”

    “모후께서 대체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제겐 안드라데와 비탈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을 중점으로 충성스러운 이들로 하나씩 귀족원을 채우면 그만입니다.”

    가브리엘라는 기가 막힌 숨을 뱉었다. 그렇게나 잘 알고 있으면서, 작금 안팎으로 힘을 실어주어야 할 비탈리 후작을 가문의 성에 구금해 놓은 실정이었다.

    한낱 브리타냐 출신의 계집에 미쳐서, 파르디타가 그 계집을 해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당분간 본보기는 필요합니다. 그간 저를 무시했던 자들에게, 부황의 힘 아래 엎드려 산 세월이 저나 어머니나 길지 않았습니까? 저들이 마땅한 공경을 보이면 회유는 그때부터 해도 늦지 않습니다.”

    더는 설득이 무용했다. 그녀는 입술을 짓씹듯 깨물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지. 네 기사들이 아직 전부 도착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우선 가장 가까운 국경에 수비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병력을 남기고, 회군을 명령해라. 가까운 시일 내로 네 숙부와 대화를….”

    “어머니.”

    “…….”

    “지금 무엇을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더는 당신의 말에 고분고분 고개나 조아리던 아들은 없습니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제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주제 파악을 다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주제 파악이나 하라고. 가브리엘라는 눈을 부릅뜬 채, 헛웃음을 내뱉었다. 카스트로의 음성에서, 표정에서 미치광이었던 로드리고의 모습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이 끔찍했다.

    그가 시종장을 향해 손짓하자, 시종장이 공손한 낯으로 검을 받쳐 들고 가까이 다가섰다. 그가 검집에서 날을 꺼내는 순간까지도 가브리엘라는 표정 없이 아들을 응시했다. 서늘한 시선이 공중에서 팽팽히 맞부딪쳤다.

    “…….”

    다음 순간 검날이 번뜩였다. 순식간이었다. 시종장이 제가 바친 칼날에 목이 잘려나간 것은. 시종장은 죽음이 닥치는 그 순간까지도 제게 뭐가 들이닥치는 줄도 몰랐다. 비명조차 없었다.

    바닥으로 털썩 쓰러진 시체에서 진득한 핏물이 대리석 바닥으로 번져나갔다. 그녀의 우아한 흰 구둣발에 닿았다.

    가브리엘라의 녹색 눈이 충격으로 굳었다. 차라리, 카스트로의 검이 제 목이나 노렸다면 이렇게까지 놀랍지는 않았을 터였다.

    “이 시종장이 마지막이었군요. 어머니께서 제게 붙여 준 사람은.”

    마지막이라고. 그러면, 여태껏 저렇게 주변을 치워왔다는 소리였다. 카스트로에게 때마다 약과 술을 가져다 바쳤던 하녀들부터, 사소하게 생활을 살피던 시종들까지 모조리….

    그가 황후에게 가깝게 다가섰다. 아들의 그림자가, 이윽고 그녀를 온전히 잡아먹었다.

    “더는 제게 명령하지 마십시오.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던 당신의 순진한 아들은, 이제 없으니까.”

    충격으로 휘청이는 황후를 바라보며 카스트로는 차갑게 명령했다.

    “선대 황후를 궁으로 모셔다드려라.”

    ***

    늦은 밤. 집무실로 돌아온 카스트로는 엘레나를 맞닥뜨리고 놀란 눈을 했다. 그녀가 이곳에 있을 줄 미처 몰랐던 것처럼.

    그가 마른 손으로 제 눈가를 짚었다. 손을 내렸을 땐 적당히 사교적이게 보일 정도로 표정이 가다듬어져 있었다.

    “식사는.”

    “이미 했어요. 전하께서, 너무 늦으셔서….”

    “아.”

    그제야 그녀와 점심 식사를 함께하기로 한 것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녀더러 집무실에 가 있으라고 했던 것도.

    엘레나는 떨리는 눈으로 카스트로를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뺨과 목덜미, 앞섶까지…. 점점이 튀어 있는 검붉은 반점은 분명 피가 튄 자국이었다.

    이만큼이나 피를 흘렸다면 누군가 치명상을 입었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르고. 순간적으로 덜컥 겁부터 났다.

    ‘설마 비센테는 아니겠지.’

    끔찍한 생각을 떨쳐 내려 엘레나는 어깨를 파득 떨었다. 불안감은 어떤 것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은, 그의 비위를 맞춰 정보든 자유든 얻어 내야 했다.

    엘레나는 조심스럽게 카스트로의 앞까지 다가섰다. 그는 그저 그녀를 말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엘레나는 제 손수건을 꺼내 그의 뺨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 냈다.

    “…….”

    그는 조금 성가신 듯 눈매를 찡그리면서도 그녀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엘레나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

    “어떤 것을….”

    “비센테가 투항했어.”

    그가 엘레나의 손을 제게서 떼어 냈다.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서재로 들어섰다. 엘레나는 그의 뒤를 곧바로 따랐다.

    “몰랐어요. 설마, 투항하실 줄은….”

    그녀는 관심이 지나친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적당한 질문을 짜냈다.

    “그러면 이제 계승 내전은 일어나지 않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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