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151)
  • “비센테 전하께 황제 시해의 혐의를 뒤집어씌울 작정이시지 않습니까?”

    카스트로는 표정 없이 이사벨라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메마른 웃음을 픽 물었다.

    “그래서 저 흔적을 일부러 남겼다?”

    “사내의 손과 여자의 손은 크기부터 다르니까요.”

    “궁의는 매수하면 그만이지.”

    “허면, 저는 무슨 죄로 죽이시려고요.”

    카스트로가 한 번 더 입술만을 움직여 빙긋 웃었다. 검 끝으로 그녀의 납작한 아랫배를 겨누었다. 그들의 뒤에 시립해 있던 사람들이 일시에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얕게 찌르자, 이사벨라의 흰 드레스 위로 핏방울이 점처럼 번졌다.

    “네 배 속에 계승권자가 들어있지 않던가. 그것만으로도 반역이다.”

    이사벨라는 무엇도 느끼지는 못하는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얕다고는 하나, 피가 배어나 올 정도로 찔린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전하께서 이렇게 무도하게 구는데, 귀족원이 여태 조용한 것이 신기하군요.”

    “그들은 이미 황제를 선택했어. 누구에게 충성해야 옳은지 제대로 판단한 거지.”

    “죽이시려면 빨리 죽이십시오.”

    “내게 충성해. 바섬 백작을 설득해 비탈리와 함께 내 검이 되겠다고 약속해라.”

    “…….”

    “그러면 짐이, 너그럽게 바섬 백작도 네 배 속의 오점도 용납해 주지.”

    “…오점.”

    이사벨라의 파르라니 떨리는 입술이 겨우 단어 하나를 뱉어냈다.

    그녀는 남편인 세르히오에게 용서를 구하는 심정으로 이 지독한 세월을 견뎌 왔다. 황제가 바섬 백작에게 막대한 부와 권력을 선사하면 선사할수록, 그것이 제 속죄라고 믿으며 버텼다.

    세르히오가 여태껏 그녀를 마냥 증오했다면, 어쩌면 그녀는 비센테의 충고대로 도망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모르기만을 바랐다.

    소문처럼 제가 황제의 대단한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 지극히 만족했다고 믿기를 바랐다. 그러니 기억하거나 추억할 가치조차 없는 여자라고, 신의를 저버린 계집이라고, 부디 그녀에게 미련 두지 말고 행복하라고.

    이안은 단 한 번도 오점도 아니었고, 이사벨라의 시간은 제 아들이 죽은 순간에 멈춰 있었다. 제 아들까지 잡아먹고 목숨을 부지한 계집이 어떻게 감히 살아갈 날을 헤아리겠나.

    겨우 도망친다 한들 누구와도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비틀릴 스스로를 알았다. 끝내는 주제도 모르고 세르히오를 미워할 자신을 잘, 알았다.

    최초의 순간 그가 로드리고의 강압을 이겨내지 못한 것을 원망하며, 세간엔 요란하게도 그의 약점씩으로나 불리면서….

    “카스트로.”

    문득, 이사벨라가 손을 뻗어 검을 쥔 카스트로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여자의 힘이라고 하기엔 우악스럽다 못해 필사적으로.

    “너는, 죽어도 황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손톱이 카스트로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이사벨라는 그 상태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건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제 스스로 검날 깊숙이 몸을 던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으니까. 고통으로 핏발 선 이사벨라의 눈이 부릅뜬 채 카스트로를 담았다.

    “그 손에 내 아들의, 제 아비의 피를 묻힌 너는 역사에 기록되지도 못할 것이다. 살인자의 핏줄로나 기억될 것이다. 미치광이로나 기억될 것이다.”

    “…….”

    “내, 죽어서도, 너를 저주할 것이다. 내 이안을, 내 아들을, 커흑….”

    이사벨라의 손을 뿌리친 카스트로가 검을 단번에 빼냈다. 피에 흠뻑 젖은 칼날로 이사벨라의 목을 긋자 그녀는 말을 더 잇지도 못한 채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겨우, 몇 번 바르작거리다 이윽고 숨이 멎었다.

    별궁의 대리석 위로 이사벨라의 피가 웅덩이를 이루며 흘러내렸다.

    “미친 계집.”

    그가 제 뺨에 튄 이사벨라의 피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아내며 짓씹었다. 그녀의 시체 위로 침까지 퉤 뱉었다.

    “태워.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지 말고.”

    ***

    “이사벨라를 죽였다면서.”

    접견실의 거대한 의자에 앉아 있던 카스트로는 빠르게 다가서는 제 어미를 낯설게 바라보았다. 황후 가브리엘라의 우아한 얼굴은 전에 없이 바싹 말라 있었다.

    이사벨라라는 이름을 듣고도 죽은 바섬 백작 부인을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던 그는 뒤늦게야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 계집.”

    “왜 그랬느냐.”

    “그 암캐의 배 속에 황제의 계승권자가 있다 지껄이신 분이 모후이십니다.”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만 죽였어도 될 일이었다.”

    카스트로는 황후의 창백한 얼굴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서 가식이나 가증의 흔적을 찾으려고. 그러나 놀랍게도 황후는 드물게 진심이었다. 그 죽음이 그녀에게도 큰 고통으로 닥친 것처럼, 아주 아깝고 비통한 일인 것처럼.

    “그 계집의 죽음을 아쉬워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끔찍하게 여기시는 줄로만 알았는데요.”

    종내에는 서로가 서로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고, 서서히 목이 졸려 같이 죽어가는 형국이었다. 그 관계의 저변에 짐작도 못할 유대감이 쌓였던 것인지….

    그 점을 지적받자 가브리엘라의 얼굴에 엷은 수치심이 떠올랐다.

    “…….”

    아마 작금의 감정에 가장 당혹한 것은 가브리엘라 자신일 터였다. 한때, 이사벨라를 아끼는 척하던 시절에도 돌아서면 이를 갈던 황후를 알았다. 가증이고, 가식의 일환이라 생각하던 모후를 그가 알았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진심으로 변질된 모양이었다. 쓸모 있는 사냥개에 먹이를 던져 주다, 곁에서 재울 정도로 정이 든 주인처럼…. 쓸모도 없이.

    카스트로는 혀를 찼다.

    “대체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죽였으면 최소한 그 시체는 온전히 보존하였어야 했다. 제 영지로 내려보낼 재 한 줌 없이 태워 바섬 백작을 자극할 것이 아니라.”

    “자극한들 백작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아직 귀족원에선 네 승계가 결정 나지도 않았어. 최소한 그들이 널 따를 때까지는 살려 두었어야지. 그 여자를 따르던 시녀들은 살려 두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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