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151)

비센테는 그녀의 인사를 고개를 끄덕여 받았다. 그가 긴 카우치에 앉자마자, 하녀 중 한 명이 차를 내왔다. 백작 부인이 웃으며 권했다.

“드세요. 그나마 이 궁 안에서 멀쩡히 남아 있는 음식이예요.”

“보급이 끊겼습니까?”

“벌써 일주일째니까요. 식사는 진작 부실해졌어요.”

“폐하께서는? 차도가 있습니까?”

백작 부인은 누워 있는 황제를 향해 턱짓했다.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하라는 듯.

“보시다시피 지금껏 의식을 찾지는 못하고 계세요. 단 한 번도 눈을 뜬 적도 없어요. 황궁의 말로는 예후가 아주 나쁘다더군요. 황후가 아주 지독한 독을 썼는지 내장이 죄다 상했다고, 썩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대요.”

냉랭한 눈으로 황제를 내려다본 이사벨라가 그 얼굴에 대고 툭 뱉었다.

“이대로 두면 하루, 이틀쯤이나 더 살아 있을까. 징그럽게도.”

“…….”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황태자를 설득하셨죠?”

“설득이라니?”

“황태자께서 별궁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을 물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요. 이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닌데… 대체 무얼 내거셨을까.”

“내 목숨.”

바섬 백작 부인은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짤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비센테가 그저 고요하기만 하자 순간 사색으로 질렸다.

“설마, 전하. 정말 그러실 생각은….”

“부인께서 걱정할 일은 아니군요.”

이사벨라는 기막힌 말을 들은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긴 하죠. 난 사실, 이 황실이 아주 지긋지긋하거든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녀는 앉아 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황제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차디찼다.

“정말이지 그렇게나 죽이고 싶던 사람인데, 이 남자가 죽을 때 곁에 남아 있는 게 겨우 나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네요. 이런 게 삶의 아이러니인가 싶어.”

“바섬 백작이 곧 군대를 이끌고 황궁으로 올라올 겁니다.”

그는 이사벨라의 자조적인 말을 끊어 내듯 말했다. 그녀는 비센테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동그랗게 뜬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이사벨라는 한참 동안 입술만 달싹이다가 겨우 한 음절을 내뱉었다.

“…그이가.”

“황태자의 기사들이 일정 거리 바깥으로 물러나면, 우리 측 기사들도 별궁에서 물러날 겁니다. 황제가 죽은 뒤 검은 깃발을 올리면 카스트로가 황제의 시신을 거둘 겁니다.”

“…….”

“그 이후 당신에 대한 처우가 어떻게 결정될지 예측되는 바가 없습니다.”

“…….”

“오늘 저녁 하녀로 변장해 궁을 빠져나가는 것을 권유드립니다. 바로 바섬 백작 측 군대로 합류하십시오. 도와줄 사람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그것 외의 다른 용건은 없었던 것처럼 비센테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부터 시체나 다름없는 황제를 냉담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그가 문고리를 잡았을 때 이사벨라가 가냘픈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전하.”

“용건이 남았습니까?”

그녀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간신히 다음 문장을 완성했다. 차마 염치없다는 듯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그이가, 저를… 용서한다고… 하던가요?”

선고를 기다리듯 꽉 맞잡은 손이 하얗게 질렸다. 파르르 떨리는 이사벨라의 얼굴을 바라본 비센테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제게 먼저 찾아온 것이 바섬 백작입니다. 그가 내게 빌더군요.”

“…….”

“당신 배 속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키울 테니, 부디 둘의 목숨만 살려 달라고.”

당혹스럽게 눈을 깜박이던 이사벨라의 얼굴이 무너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달리, 눈물 한 방울 없이 메마른 눈이 묘한 대비를 이뤘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네. 충분히.”

***

황제가 죽은 것은 예정보다 이른 초저녁이었다. 별궁의 꼭대기에 검은색 깃발이 내걸리는 것과 동시에, 궁을 둘러싸고 지키던 기사들이며 일꾼들이 모조리 별궁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텅 빈 궁은 삭막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시체와 함께 있어 더 그러한지…. 자조적으로 웃은 여자는, 죽은 황제가 입고 있던 의복을 마지막으로 정돈한 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마자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바섬 백작 부인. 놀랄 일이군. 당연히 도망친 줄 알았는데.”

“…황태자 전하.”

그녀는 카스트로와 그 뒤를 따라온 사람들의 면면을 한 번씩 훑었다. 시종장, 기사, 황궁의, 그리고… 황제의 임종을 선포할 대주교.

이사벨라의 곁을 스치듯 지나친 카스트로가 이미 시퍼렇게 변한 황제의 시신을 보고 가볍게 혀를 찼다.

“생각보다 곱게 죽었군. 냄새는… 생각보다 더 독하고. 언제쯤 숨이 넘어갔지?”

“제가, 죽였습니다.”

“…뭐?”

“황제께서는 예정대로라면 이틀을 더 사셨어야 했습니다. 목을 보시면 제 손으로 목을 조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내버려 둬도 천천히 죽어 갔을 자를, 기어이 제 손으로 끝내고 만 것은 기묘한 복수였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로드리고를 마지막 순간 편히 보내 줬다는 것에서, 특히.

곧 이안을 보러 갈 테니 그 애가 원하는 것 하나쯤은 들어주고 싶어서인지. 이안은 늘 로드리고를 잘 따랐으니까….

“그러면 그대는 반역자군.”

그녀의 생각을 툭 끊어낸 카스트로가 제 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어 들었다. 긴 검 끝이 바닥에 살짝 끌리는 소리가 났다. 이사벨라는 곧은 시선을 들어 제 아들의 살해자를 마주했다.

“그럼, 그렇게 공표하시겠습니까?”

“무슨 꿍꿍이로 그렇게 묻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