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시해 혐의든, 3황자의 죽음이든. 무엇을 가져다 붙이든 마음대로 해. 모두 인정할 테니까.”
그 결과 2황자의 이름이 얼마나 너저분해지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세력은 사촌이자 올리바레스 공작인 리카르도에게 넘어갈 테니까. 과거에 미리 내정해 두었던 대로….
만약 엘레나가 그를 완전히 저버린 게 아니라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그의 생에 가치는 없었다. 어차피 복수 성공하면 스스로 끊어 버리려 했던 목숨이다. 그저 시기를 조금 앞당기는 것뿐이었다.
그가 죽기만 하면 카스트로는 일말의 조심성도 잃고 폭주할 테니까. 비센테를 필두로 한 세력들이 오합지졸이 되었다고 착각하고 주변을 돌아보지도 못할 테니까.
리카르도의 칼날이 제 목에 들이닥치는 그 순간까지도….
‘엘레나.’
마지막 순간까지 걱정되는 것은 오로지 그녀 하나였다. 리카르도가 황좌를 차지하는 데 성공한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이벨린이 엘레나라는 것을 카스트로가 알아차린 게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집착적인 성미대로라면, 엘레나를 그대로 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황후의 자리에 올린다고 해도 감시가 지독하겠지.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황제나 드나들 수 있는 궁에 엘레나를 유폐하는 미래였다.
“네 귀한 목숨을 내주는 대가로 엘레나가 원하는 걸 들어주라고?”
기막힌 듯 코웃음 치던 카스트로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듯 실실거리다가, 이윽고 낄낄거리는 광소로 변했다.
“엘레나는 너를 증오해. 알아? 내게 널 죽여 달라고 말하더군.”
비센테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래.”
“내 황후가 되겠다고 맹세한 건. 그것도 아나?”
“그랬군.”
“넌 버림받은 거야. 불쌍하게 버림받은, 개만도 못한 비센테. 그 고귀한 혈통으로, 그 낯짝으로… 응? 저를 돌아보지도 않는 계집에게 홀려서는.”
그를 도발하기 위해 내뱉은 카스트로의 말은 어떤 것도 상처가 되지 못했다. 엘레나가 황후가 되기를 원했다면 그녀는 그렇게 되어야 했다. 그는 정말로 상관없었다. 제 목숨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그녀가 또다시 자살하려고 들지 않는다면. 그저 남은 생 동안 행복할 수 있다면.
“…….”
내내 태연한 척 굴고 있었지만, 그는 사실 반쯤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상태였다.
엘레나를 또 한 번 잃고 다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 전까지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었지만, ‘이벨린’의 몸으로는 무엇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참 기이했다. 어떻게 한 번뿐인 목숨을 이토록 무방비하도록 내놓고 태연하게 살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그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불안한데….
언젠가 지독하게 쓸쓸한 표정을 짓던 엘레나를 떠올리자, 비센테의 청보라색 눈동자가 서서히 무너졌다. 이윽고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솔직해지자. 그를 여기까지 몰아붙인 것은 고작해야 충동이었다. 엘레나를 단 한 번만 다시 보고 싶다는 충동,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해야만 하겠다는 충동, 그저 행복하기를 바라는 이기심….
그래, 사실은, 그 작은 손을 다시 한 번 잡아보고 싶어서. 제가 죽더라도.
“카스트로. 너는 이 방에 들어선 순간, 세 가지 실수를 저질렀어.”
“…실수? 내가?”
“첫 번째는 시종의 태만을 감시하지 않은 것, 두 번째는 날 독대하기로 결정한 것,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내게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것.”
“무슨, 개소릴.”
카스트로가 반응하기도 전에 비센테가 움직이는 것이 더 빨랐다. 테이블 아래로 손을 잠시 내렸다고 생각한 다음 순간, 비센테가 품 속에서 길쭉한 리볼버를 뽑아 들어 곧장 카스트로의 이마를 겨눴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곧은 자세로.
철컥,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가 섬뜩했다.
“…….”
카스트로는 순간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그저 비센테의 우아한 얼굴에 넘실거리고 있는 증오가 생경한 듯 멍청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야 그렇겠지. 저만 그를 증오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을 테니까, 그들의 관계에서 저만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내내 이빨을 갈아 댔을 테니까….
그러다 뒤늦게야 제게 겨누어진 총구를 인지했다.
“…너, 이 새끼.”
이윽고 상황을 인지한 카스트로는 목부터 서서히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드물게도 성질을 곧바로 폭발시키지 않고 억눌렀다. 제 머리를 겨누고 있는 것은 말 그대로 총이었으니까. 안전장치가 풀린, 약실마다 탄약이 그득 장전된 살상용 무기.
게다가 비센테 본인이 군인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안정적으로 겨눠진 자세는 저항 의지부터 꺾이게 했다.
카스트로는 잇새를 악물었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들숨과 날숨소리가 거셌다.
“…개, 같은 새끼…. 원하는 게 뭐야?”
청보라색 눈동자를 가늘게 좁힌 채로 카스트로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비센테는 이윽고 픽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이 모든 게 아주 지독한 장난이었던 것처럼.
그가 리볼버를 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지금 네 머리를 날려 버리지 않은 건, 엘레나의 계획에 대해 내가 들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네가 그 미래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 때문에.”
“…….”
“금언과는 관계도 없어. 누누이 말했듯, 내 목적은 황좌가 아니야.”
“…….”
“그러니까 주변 들쑤시지 말고 나만 죽이도록 해. 엘레나는 자유롭게 놔주고.”
어차피 진정한 쟁탈전은 황제가 죽고 나서야 시작될 터였다. 엔리케는 오늘의 일로 그에게 실망하고, 리카르도를 진심으로 따를 터였다. 그가 유도했던 대로.
카스트로는 그제야 정말로 그의 말이 믿어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농담이나 지독한 속임수로 여기는 게 아니라.
“…그렇게만 해 주면, 네가 다 떠안고 죽겠다고?”
“그래.”
처음부터 그에게 주어진 삶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였다. 엘레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기로 결심한 마당에, 그녀를 희생시키며 얻고 싶은 것은 무엇도 없었다.
“그것만 약속하면 네게 무엇이든 협조하지.”
***
침대맡에 앉아 있던 바섬 백작 부인은, 비센테를 보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꽃 같던 얼굴이 말도 안 되게 상해 있었다. 황제가 쓰러진 뒤로 황후와 황태자가 보낸 암살자를 경계하느라 지나치게 심력을 소비한 듯했다.
“어서 오세요, 2황자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