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151)

기사는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따로 언질을 받은 바가 있는지 일관된 태도로 무시했다. 대화가 통한다는 시늉조차 보이지 않았다.

부드럽게 회유하던 엘레나는 끝내 이성을 잃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

***

“반쯤 미친 꼴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멀쩡하네.”

비센테는 카스트로의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카스트로가 문간에 선 채로 눈매를 가늘게 좁혀 뜨고 있었다. 그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매서웠다. 황궁에 파란을 불러일으키고도 태연한 그 태도가 마음에 차지 않는 것처럼.

핏발 선 카스트로의 눈에선 끈질긴 의심과 희열이 불티처럼 자글거렸다. 그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응? 비센테. 대체 무슨 속셈이야?”

“네 부족한 정당성을 채울 기회를 주려는 거지, 카스트로.”

적들의 한복판에 단신으로 투항해 놓고도 비센테는 여유로워 보였다. 저 속이야 어떻든, 적어도 겉으로는.

“귀족원의 절반이 내 뜻을 따르기로 서약했다. 네가 네 아비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해도 지금 상태로는 네 정당성을 인정받진 못할 거야.”

비센테가 앉아 있던 중앙까지 빠르게 다가온 카스트로가, 그의 앞에 놓인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격렬한 분노를 숨기지도 않고 터트렸다.

“총과 칼이면 누구든 죽지. 비센테, 당장 너부터 지금 죽여 줄까?”

“마음대로 해. 그 뒤엔 귀족원을 무력으로 제압해야겠군. 그들이 가장 경계하는 게 금언을 어긴 황제일 테니까.”

“…황좌가 비어 있는 동안, 혈육 간 소모적인 쟁탈전을 벌이지 말라. 지금 그 케케묵은 금언을 들먹이는 건가?”

“역대 황좌에 올랐던 이들 중 그 금언을 정면으로 어긴 역사는 아무도 없었지. 그 최초의 불명예를 카스트로, 네가 떠안고 싶은 게 아니라면야.”

“엄밀히 따지자면 폐하께서는 아직 살아계셔.”

“정확히는 의식을 잃고 죽어 가고 계시지. 현시점에서 황좌는 명백히 공석이다.”

“아하.”

카스트로의 눈이 허세와 야욕으로 번들거렸다. 웃는지 우는지 입술은 잔뜩 뒤틀린 채였다.

“그깟 귀족원의 의견이 뭐라고. 내가 그런 알량한 것에 흔들릴 사람으로 보이나? 응?”

“귀족원의 만장일치를 얻지 못한다면 네 통치는 시작부터 불안정하겠지. 귀족원은 사사건건 네가 내놓는 안건마다 반대 의견이나 제시해 댈 테고, 너는 그때마다 골머리나 썩겠지.”

“…….”

“대귀족들이 인정하지 않는 황제를 지방의 군소 귀족들이라고 인정할까? 평판을 잃으면 황제도 끝이다, 카스트로. 네가 그걸 몰라서 뻗대는 건 아닐 테고.”

귀족들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하는 황제는 시민들로부터도 버림받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유행처럼 공화주의가 번지는 요즘 같은 시절에는 더더욱 민심을 살펴야 했다.

성난 시민들에 의해 왕이 끌어 내려지는 시대였으니까. 에스페다가 전쟁을 기반으로 그간 황권을 공고히 유지해 온 것과 달리.

그 우호적인 민심의 8할이 비센테의 지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냥 죽여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꼴에 전쟁 영웅이었으니까.

재판으로는 도저히 죽일 수조차 없지. 카스트로는 신경질적으로 제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으르렁댔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지?”

“말했잖아. 네게 정당성을 얻을 기회를 주겠다고.”

“그깟 정당성.”

“말이 같은 지점을 계속 도는군. 훗날을 생각해, 카스트로. 나 말고도 네 황위를 대체할 계승권자는 많아.”

“…바섬의 계집은 죽이면 그만이야.”

“아직 수중에 넣지도 못한 여자를 어떻게?”

비센테의 지적에 카스트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제 의견과 반대되는 것을 들을 때면 늘 그랬듯.

“아하….”

그러나 평소와 달리 카스트로는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그뿐 아니라, 피식 웃기까지 했다.

“네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를 것 같아? 그 계집 때문이지?”

“…….”

“이벨린… 아, 이제는 이렇게 불러야 하나.”

“…….”

“엘레나.”

덤덤하게 가라앉아 있던 비센테의 얼굴에 순간적인 동요가 일었다. 지극히 찰나여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균열.

비센테는 테이블을 위를 배회하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우아한 청보라색 눈으로 카스트로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카스트로. 그 말을 믿나?”

“믿지 않을 이유가 없지. 정말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럴듯하고.”

“…….”

“진짜든 아니든 꽤 먹음직스러운 계집이지 않나? 엘레나가 맞다면야 황후의 자리를 주면 되겠고, 아니라면 그저 질릴 때까지 즐기면 그만이야.”

“네 말대로 증거는 오로지 그 여자의 주장뿐이라는 것을 기억해, 카스트로.”

“그럼에도 네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 그 계집을 믿어서가 아닌가?”

“아니.”

예상 밖의 단호한 대답에 카스트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말에서 교묘한 함정을 찾아내려는 것처럼.

비센테는 재차 말을 이었다.

“그 여자의 정체가 이벨린이든 엘레나든 이젠 상관없어. 네게 협조하지. 조건은 그 여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줘. 자유든, 돈이든, 지위든….”

“…….”

“그러기만 하면 널 위해 기꺼이 네 혐의를 뒤집어 써 주지. 내게 공개 재판을 청구해.”

카스트로의 눈매가 뱀의 꼬리처럼 가늘어졌다. 아주 의심스러운 것을 들여다보듯.

“…진심인가?”

“그래.”

엘레나가 황궁으로 들어간 것을 알면서도 그가 바로 달려오지 않았던 것은, 그가 죽은 뒤를 예비하기 위해서였다. 여태껏 구심점이던 지도자를 잃고 우왕좌왕할 세력을 다독이기 위해서. 오로지, 저 혼자만을 희생하고 끝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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