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151)
  • “네가 써 준 편지를 하녀를 통해서 부쳤어. 비야톨레드의 E씨에게. 오늘이나 내일 저녁쯤엔 답장을 주신다고 했대.”

    “잘됐네. 몸은 좀 어때?”

    “며칠은 거뜬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무언가를 전하려던 아멜리아는 중간에 자신의 말실수를 알아차린 사람처럼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엘레나는 그녀의 팔을 가볍게 잡고 채근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별 건 아닌데. 지금 갑자기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것 같아. 하도 말이 안 되어서 이걸 네게 전해도 좋을지….”

    “이상한 소문?”

    “나도 자세한 건 잘 모르겠어. 워낙 두서없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와서…. 뜬소문일 수도 있으니까, 확실하게 알게 되면 바로 알려 주러 갈게.”

    “알겠어.”

    “그러면 저녁에 봐.”

    엘레나는 제자리에 선 채로 올 때만큼 빠르게 멀어지는 아멜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황태자 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멜리아는 별일 아닌 뜬소문일지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황궁의 생리에 대해서 잘 아는 그녀로서는 분명한 흐름이 느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기사들이 죄다 뛰쳐나갈 정도면.’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던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비센테의 군대가 벌써 도착했나? 그런데 그게 가능해?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은 걸릴 텐데.’

    그 순간, 어떤 가능성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니까, 만약 반대의 경우였다면 그녀가 비센테를 위해 할 법한 어떤 행동이.

    ‘설마…. 아니겠지.’

    엘레나는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버릇처럼 목걸이를 매만졌다.

    그래. 아닐 것이다. 그것만은 아니어야 했다.

    ***

    엘레나는 지친 몸으로 카스트로의 집무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평소라면 얌전히 응접실에서나 기다렸겠지만, 지금은 서재의 문을 열 아주 적절한 핑곗거리가 있었다.

    ‘몸을 되찾을 방법’을 찾기 위해서 그가 읽었던 고서적을 참고하고 싶다는….

    오늘의 카스트로는 그녀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둔 것처럼 보였다.

    ‘귀중한 정보를 가지고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까.’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었다. 그녀는 집무실과 서재의 문을 꽉 닫지 않고 틈을 조금씩 남겨 두었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면 재빨리 정돈할 태세를 갖춘 채, 능숙하게 숨겨진 열쇠를 찾고 비밀 금고를 열었다.

    서류들이 엄두도 안 날 정도로 금고 안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양피지와 종이의 빳빳함을 가늠했다.

    ‘3황자가 죽은 건 불과 몇 달 전 일이니까….’

    새로 작성된 서류들 위주로 확인하면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서류철을 헤집었다. 문제는 암호를 썼는지, 3황자와 관련된 내용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손을 멈추고 주변의 동태를 살폈다. 아직은 별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엘레나는 다시 마음을 놓고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나마 비슷한 게, 큼직한 공터를 임대했다는 부분인데…. 3황자의 시체가 바섬 백작 부인을 압박할 수 있도록 중요하다면, 카스트로의 성격상 외부로 빼돌렸을 리는 없어. 그렇다고 서쪽 탑도 아닐 거고….’

    그녀는 마지막 서류를 확인하며, 의식도 못 하는 새에 입술의 거스러미를 뜯었다. 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대체 어디에 보관해 뒀을까….

    ‘의심과 경계심이 많은 성격이니, 같이 뒀다가 하나가 들키면 줄줄이 엮일 수도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빠르게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서둘러 비밀 금고를 닫고, 열쇠를 원래 위치에 돌려놓았다.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책 중 하나를 펼쳐 들기 무섭게, 서재의 문이 벌컥 젖혀졌다. 아멜리아였다.

    “엘레나.”

    제게는 집무실의 서재가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도 잊어버렸을 정도로 완전히 패닉에 빠진 얼굴이었다. 엘레나는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정도까지 사색이 되려면 황제께서 돌아가셨나? 아니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비센테의 군대가 벌써 황궁을 둘러쌌나?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별궁을 지키던 비센테 전하의 기사들이 물러나고 있어. 황제 폐하를 지키는 건 이제 정말 바섬 백작 부인과 바섬 가문의 기사들 몇 명뿐이야.”

    “…뭐?”

    바섬 백작이 아무리 군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우두머리가 잡힌 판국엔 함부로 군대를 움직일 수 없다. 물론 그 군권마저도 영지에 칩거한 백작에게 황제가 억지로 쥐여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바섬 백작은 무인이라기보단 문인이었고, 군대의 계급 표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지 의문일 정도로 군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자에게 군권은 제 아내를 바친 대가로 받은 화대나 마찬가지였으리라.

    그 강직한 사람에겐 굴욕이었을 터였다. 그러니 여태껏 제 아내가 감금되어 있는데도 영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일 테고….

    그녀는 길어지는 생각을 잘라 냈다. 우선은 비센테의 군대가 물러나게 된 계기부터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황궁이 아주 소란스러워. 설마, 폐하께서 돌아가신 거야?”

    “그런 문제가 아니야. 지금….”

    아멜리아는 도저히 어떻게 포장해야 할지 모르겠단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는, 눈을 꽉 감았다.

    “비센테 전하께서 단신으로 투항하셨어.”

    “투항했다고?”

    엘레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아멜리아의 말을 반복했다. 반복하면서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가 지금 황궁에 있다고? 그것도 단신으로? 군대며 몸을 지켜 줄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그가 그렇게 카스트로를 만나서는 안 되었다.

    “지금 본궁으로 가 봐야겠어. 지금, 당장….”

    허둥거리며 책상에서 벗어나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마자 그녀는 거구의 기사와 맞닥뜨렸다. 그녀는 대충 인사하고 문틈 사이로 몸을 집어넣어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족족 기사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의도가 노골적으로 보였다. 엘레나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치떴다.

    “…황태자 전하의 기사인가요? 전하께서 절 여기 붙잡아 두라고 하셨죠?”

    “…….”

    “제가 지금 급해서… 전하께 지금 당장 뵙고 싶다고 말씀 좀 전해 주세요. 제가 도망갈 것 같아 걱정이라면, 아멜리아를 보내서 다른 사람을 불러오도록 해 줘요.”

    “…….”

    “그것도 안 된다면, 저를 직접 전하께 인도해 주세요. 지금 급히 뵈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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