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8/151)

“네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직도 모르나?”

“…네?”

“네게 주어진 운명 때문이야. 네가 내 황후로 예정되었기 때문에.”

미친 소리도 정도껏…. 그녀는 험악한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네 몸은 시간이 멈춘 것이나 다름없다더군. 비센테가 널 죽인 바로 그 순간에 머물러 있는 거야.”

“…….”

“그리고 에스페다의 초대 건국제가 시간과 관련된 마법에 능통했다고 하더군. 시간의 ‘축’을 비틀거나, 반복하거나, 혹은 아예 그 시간대를 소멸시키거나….”

어딘가 이상했지만, 묘하게 정답에 근접한 결론이었다.

“어떻게….”

“어제 네가 그딴 소리를 지껄인 이후에 역사서를 좀 훑어봤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가, 그녀를 제 몸과 석관 사이에 가뒀다. 등 뒤로 석관의 딱딱한 모서리가 아프게 닿았다. 카스트로가 희열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결국 네가 이렇게 된 것은 내가 널, 지키고 싶어 했기 때문이야. 네 아비가 비록 날 끌어내리기 위해 반역을 저질렀다고 해도, 운명이 너와 나를 부부로 엮어서.”

“…….”

“드디어 어머닐 믿을 수 있겠군.”

그의 목소리는 아주 공허하면서도, 지극한 기쁨에 휩싸인 것처럼 들렸다.

엘레나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살짝 뒤틀었다. 등 뒤가 바로 석관이라 허리를 젖힐 공간은 충분했지만, 카스트로가 양팔로 퇴로를 막고 몸을 바짝 붙인 탓에 움직일 수 있는 공간 자체는 좁았다.

그녀의 모든 탈출 시도를 손쉽게 무위로 돌린 그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아,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기쁘군.”

터져 나온 웃음과 광기가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카스트로는 그녀의 관자놀이에 제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피부를 따라 점점이 아래로 내려왔다.

“넌 신께서 나를 위해 안배한 증거야. 내 혈통의 완전함을 증명하라고, 에스페다 황실의 피가 내게 흐르는 것을 증명하라고, 그러므로 내 아비라는 작자가 망상에 시달리는 미치광이에 불과했다는 걸, 증명하라고!”

그가 그녀의 손목을 세게 억누른 채, 오른손으로 턱을 붙잡아 올렸다. 석관에 닿은 손등이 아팠지만 엘레나는 어떤 것도 내색하지 않았다.

무엇이라도 감정을 드러내면 지는 것만 같아서. 이 강압에 굴복해 버린 것만 같아서.

“드디어 네가 내 것 같아. 온전히 나만의 것 말이야. 내 순결한 엘레나….”

“…….”

“부디 저기 누워 있는 네 태가 망가지지 않았기를 바라. 나는 네게서만 아이를 볼 작정이거든.”

그 가정은 처음부터 틀렸다. 엘레나의 시선이 차가워지는 것도 모른 채, 그가 그녀의 뺨과 목덜미에 번갈아 고개를 처박았다.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피부 위로 뭉그러졌다.

아주, 혐오스럽게도.

“물론 네가 아이를 품은 열 달 동안은 널 완전히 가둬 둘 거야. 우리 아이는 아주 완벽한 상태에서 태어나도록. 누구도 한 점 의심도 못 하도록.”

“…….”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몸을 되찾도록 해,”

***

그들이 막 철문을 빠져나오려는 찰나에 누군가 허겁지겁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엘레나는 태양을 가리기 위해 손차양을 한 채 남자를 살폈다. 익숙한 낯이었다.

황후 가브리엘라의 육촌이자, 카스트로의 참모인 오세라 자작.

과거에는 카스트로가 치고 다닌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더니, 2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간 마음고생이 특히 심했는지 안 그래도 위험하다 싶던 머리가 중간까지 훌렁 벗겨져 있었다.

“저, 저, 전하. 시, 시급한 용무입니다!”

헐떡이며 뛰어온 그가 손수건으로 이마와 정수리의 땀을 닦으며 외쳤다.

“자작. 호들갑은.”

카스트로는 심드렁히 대꾸했다.

“저, 정말, 이번에는 정말 큰일입니다! 지금 당장 본궁으로 가셔야 합니다. 저뿐 아니라, 다들 아주 난리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똑바로 이야기해.”

카스트로의 신경질에 자작은 엘레나를 흘끗 바라보더니, 카스트로에게 바짝 다가가 붙었다. 무어라 속삭이는 소리는 아주 작아서 잘 들리지도 않았다. 다만, 그 말을 듣는 카스트로의 표정 변화는 똑똑하게 목격했다.

부릅뜬 눈과 충혈된 눈동자, 벌어진 입술. 그는 놀란 것 같기도 했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동시에 당장이라도 폭소를 터트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가 봐야겠군. 나의 궁으로 돌아가는 길은 알고 있겠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그러면 점심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점심?”

지금 그깟 게 중요하냐는 듯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본 카스트로가 손을 내저었다.

“집무실에 가 있어. 그때까진 돌아갈 테니까.”

“네.”

“그럼, 서두르지. 자작. 가면서 자세히 설명해 봐. 무슨….”

그녀는 카스트로가 성큼성큼 멀어지는 것을 가만히 선 채로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일까? 기사단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거대한 흐름처럼.

시종들의 움직임도 평소와는 달랐다. 마치 급류에 휩쓸려 배에서 떠내려간 사람들처럼 허둥거리고 있었다.

“엘레나.”

그녀는 제 이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쪽 탑 앞의 거대한 공터를 아멜리아가 빠른 걸음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본궁에서부터 곧바로 온 것 같았다.

엘레나는 그녀를 향해 재빨리 다가섰다.

“아멜리아. 무슨 일이야?”

아멜리아는 주변을 휙 둘러보곤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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