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151)
  • 그제야 아멜리아가 원하는 ‘도움’이 무엇인지 정확히 보였다. 단순한 낙태가 아니라, 완전한 증발 혹은 탈출. 무엇이 되었든 황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

    “나 혼자서는 황궁을 벗어날 수 없어. 요즘 황후 폐하의 수족들이 내 거취를 거의 시간 단위로 감시해.”

    “마음은… 확실히 정한 거야? 아이를 지우기로?”

    아멜리아는 조금 머뭇거렸다.

    “솔직히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바뀌어. 하지만 황후께서 아시는 날엔, 정말 붙잡혀서 도리 없이 아이를 낳아야만 할 테니까…. 적어도 천천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

    “황후께서 의심이 짙어지셨어. 내가, 음식 냄새도 잘 못 맡게 되어서…. 시간이 정말 없어. 하루라도 빨리 황궁을 벗어나야 해.”

    아멜리아의 고운 얼굴이 애원하듯 일그러졌다.

    “만약, 내가 아이를 낳게 되더라도 아이가 황족이랍시고 너희 앞에 나타날 일은 죽어도 없을 거야. 정말,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엘레나는 막막한 숨을 터트렸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해?”

    “맹세할게. 황태자 전하께서는 아직 짐작조차 못 하셔. 황후께서 의심하고 계시긴 해도 확증은 여태 없으시고….”

    완고하던 얼굴이 조금씩 무너졌다. 이제는 애원이었다.

    “…….”

    물론, ‘엘레나’는 도울 수 있었다. 그녀는 ‘황태자비’에게 전해지는 황궁의 비밀 공간들을 몇 군데 알았고, 그중 몇 개는 황궁 바깥으로 통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외부에서 침입은 불가능했다. 오로지 유사시에 탈출 용도로나 사용할 수 있는 좁은 길이었다.

    몇 가지 방법을 떠올리느라 흐려진 엘레나의 표정에 조급증이 치민 듯, 아멜리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절박한 힘이었다.

    “황궁을 몰래 빠져나가고 나면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할게. 너는 황궁의 비밀 통로들을 알고 있잖아. 도와줘, 엘레나. 제발.”

    “물론 당연히 도울 거야, 아멜리아. 지금 내가 걱정하는 건 오로지 네 몸뿐이야. 홑몸도 아닌 너를 그렇게 혼자 보낼 수는 없어.”

    “…….”

    “레베카는? 이 일에 대해 알아?”

    아멜리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애를 끌어들여선 안 돼. 이제 겨우 결혼해서 안정된 아이인걸.”

    “황궁을 나가면. 갈 곳은 있어?”

    “어디든. 가문으로는 돌아가지 못하니까, 몸을 추스를 때까진 머무를 곳을 알아봐야지.”

    엘레나는 초조하게 방 안을 걸어 다녔다. 아멜리아가 아이를 지운다면 모를까, 만에 하나라도 낳기로 결정 한다면? 에스페다는 아이를 낳아 키우기엔 위험했다.

    귀족들의 사회망은 촘촘했고, 아멜리아쯤 되는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면 아주 시골로 들어가야 몇 년 눈속임 정도는 될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시골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치안이 형편없었다.

    영주에게 돈을 쥐여 주고 괜찮은 집과 땅을 마련할 수는 있어도, 좀도둑이 드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경호원을 고용하기엔 마을 전체에 소문이 돌 테니까….

    “…….”

    그녀는 엔리케가 브리타냐행 배편에 대해 스치듯 언급했던 것을 떠올렸다. 비단 그를 통하지 않더라도, 비센테 또한 브리타냐로 떠날 것을 염두에 두고 출항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던 걸 알았다.

    이제는 아주 어그러졌다고는 해도 준비하던 것은 남아 있을 테니까…. 엔리케에게 연락하면 아멜리아를 도울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 믿을 만한 하녀는 있어? 레베카와 연락을 주고받을 때 쓰는 아이라든가.”

    “있긴… 한데….”

    “그 하녀가 황태자나 황후 폐하의 손을 타지 않은 건 확실해?”

    “그건 확실해.”

    “그러면 정말 잘 생각하고 결정해야 해, 아멜리아. 이대로 도망친다면 평생 쫓기는 신세가 될지도 모르지만, 남는다면 네 아이는 황족이 될 수 있어. 네가 황궁에서 버틴다고 하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네 아이가 인정받을 방법을 찾아볼게.”

    “…….”

    “법적으로 네 신분을 보장할 방법이 있어. 만약 황제가 바뀐다고 해도 어린 황족과 그 생모를 비난 없이 죽일 수는 없어. 제국법상 넌 ‘귀부인’의 칭호를 받게 될 거야.”

    “…….”

    “하지만 네가 이대로 황궁을 떠난다면 그 뒤에는 도와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어.”

    엘레나는 잠깐 침묵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그 모든 걸 각오했다고 하면… 브리타냐로 떠나는 배편을 알아봐 줄게. 당분간 네가 지낼 곳도….”

    코라가 지내고 있는 브리타냐의 안전 가옥이면 한동안 아멜리아가 머무는데 불편함은 없을 것이다. 비센테가 그녀에게 보여 준 서류대로라면 제법 쾌적한 저택이었으니까.

    아이를 낳거나, 지우더라도 ‘아멜리아 데 모라’의 명예엔 아무런 문제도 없을 먼 땅이었다.

    문제는 이대로 그녀가 떠나면,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아멜리아, 나는….”

    그녀는 말을 채 뱉지도 못한 채 입술을 사리물었다.

    ‘엘레나 데 카스타야’의 인간관계는 언제나 아주 비좁았다. 소중한 사람이 많다는 건, 그만큼 약점이 많다는 뜻이었으니까.

    그 수순으로 예비 황태자비였던 시절에는 곁에 사람들을 두는 것을 기피했다. 피치 못하게 두더라도, 애정을 주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럼에도 재앙처럼 들이닥친 사람들이었다.

    아멜리아와 레베카, 라우라, 비센테…. 그들 모두가 다 같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조차 죄일까?

    “…….”

    그래. 결국 이성적인 척 떠들고 있었지만,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거의 애원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있었다.

    그냥 에스페다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고, 우리 모두가 더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볼 테니 조금 더 곁에 머물러 줄 수 없겠느냐고. 왜 네가 나 때문에 인생에서 그나마 누렸던 풍요로운 것들을 모조리 포기해야만 하느냐고….

    아멜리아가 다 이해한다는 듯 조용히 미소 지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엘레나.”

    아멜리아가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네가 나를 아주 염려하고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마워. 하지만 황태자 전하와의 관계는 결국 내가 동의한 거야. 네가 죄책감을 느끼거나 내 미래를 책임져 줄 필요는 없어.”

    “…….”

    아멜리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훅 들이켰다. 커다란 용기가 가슴속에서 충분히 부풀 때까지.

    “떠나는 걸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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