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아는 무엇도 비난하지 않았다. 그게 도리어 가슴을 저미게 했다.
엘레나는 그 감정을 애써 삼키곤 콧등을 찡그리며 일부러 더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뭘 보고 확신하죠? 아멜리아. 나는….”
“네 버릇을 아직 모르는구나. 너는 거짓말로 숨기고 싶은 게 있을 때, 오히려 더 강하게 나오잖아.”
“…….”
“처음엔 정말 영혼을 보는 여자라고 생각했어. 힐다처럼. 내가 힐다를 잘 따랐던 걸 알잖아.”
과거의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는지 아멜리아는 흐리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미소는 무표정으로 변했다.
“하지만 엘레나가 유령 된 몸으로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면 내 상황을 더 잘 알았겠지. 내게 돈보다 다른 걱정거리가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을 테니까.”
엘레나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아멜리아가 생활고를 겪는다는 소문을 듣고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해 깊게 생각하지 못한 실책이었다.
완전히 얼어붙은 엘레나의 표정에 아멜리아가 조금 웃었다.
“널 본 적도 없는 여자가 네 비밀을 알고 있어. 그러면 답은 하나뿐이잖아.”
엘레나는 눈을 탁 감았다. 솔직해지자면, 그녀는 아멜리아나 레베카에게 진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크게 충격받을 테니까. 이 엉망진창인 상황에 기꺼이 뛰어들려고 할 테니까.
“…미리 말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사실, 가능한 한 그들만은 어떤 것도 모르도록 지켜 주고 싶었다. 아멜리아는 그녀가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전부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네 상황에 나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겠지. 엘레나, 내가 설마 너를 모르려고.”
“…….”
“그런데, 지금은 나도 정말 상황이 좋지 못해서… 네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해.”
아멜리아의 얼굴은 절박했다. 엘레나는 직감적으로 이 용건이 별궁에 머물렀을 때, 아멜리아가 그녀를 찾아오려던 이유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엇이든 도울게, 아멜리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야기가 길어.”
“괜찮아. 천천히 해. 자리에 좀 앉아도 되고.”
“네가 비센테 전하의 손에 죽임을 당한 그날 말이야.”
급작스럽게 시작된 아멜리아의 말에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멜리아는 모든 것을 아주 서두르고 있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이 정말 얼마 되지 않는 것처럼.
“그 직후 나는 네 몸을 정돈하라는 명을 받고 불려 갔어. 한동안 너는 정말 시체 같았어. 차갑고, 뻣뻣했고, 숨도 쉬지 않았어.”
과거를 회상하는 아멜리아의 시선은 조금 멀었다.
“하녀들과 함께 널 닦이고, 머릿결을 정돈하는데… 네 가슴이 갑자기 오르내리기 시작했어. 믿기지 않겠지만, 너는 정말 죽었다가 되살아났어. 온몸이 여전히 시체처럼 차갑고 창백하긴 했지만…. 죽었느냐,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분명히 살아 있는 육신이었어.”
“…….”
“다들 놀랐지. 황태자 전하께선 그걸 목격한 하녀들을 모조리 입단속을 시키고, 내게 황후 폐하의 종신 시녀가 될 것을 요구하셨어.”
입단속을 시켰단 소리는 죽였다는 의미일 터였다.
“말이 황후 폐하의 종신 시녀지, 결국 네 몸을 살뜰히 돌보라는 명령이었지. 황태자 전하께서는 한동안 적극적이셨어. 널, 다시 깨울 수 있다고 믿으셨으니까.”
어떤 것에도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내리뜬 아멜리아의 눈에 문득 선득한 빛이 어렸다.
“그러다가 황태자 전하께서… 내가 네 체형을 닮았다고 말씀하셨어.”
“…….”
“엘레나가 없으니, 너라도 대신하라고. 수락하지 않으면 레베카에게도 같은 제안을 하겠다고 하셨지. 그 애도 거부하면….”
네 몸에 손을 대겠다고. 아멜리아가 속삭이며 덧붙인 말에 엘레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정해 가며 순진한 아멜리아를 압박했을 카스트로의 저열함에 치가 떨렸다. 실제 그 당시엔 훨씬 더 끔찍한 말들을 배설했을 터였다.
그나마 고상한 아멜리아니, 덜 적나라하게 포장해서 전달하는 것일 테고.
“그래서 수락했고, 버텼어. 너는, 레베카와 더불어 내 둘뿐인 동생이었으니까.”
아. 엘레나는 밀려 나오는 탄식을 가까스로 삼켰다.
곧 죽을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엘레나의 얼굴에 아멜리아가 희게 웃었다.
“버틸 수 있었어. 우리는 피를 나눈 가족보다도, 더 가족 같았으니까….”
“…정말,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내 몸이 그런 줄도 몰라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두서없이 쏟아지는 엘레나의 말에 아멜리아가 그녀의 손을 한 번 더 끌었다.
“미안해하지 마. 서쪽 탑에서 네가 우리 때문에 카스트로 전하의 강제를 단 한 번도 거절하지 못한 것을 알아. 그것과 같은 거야.”
“…하지만 아멜리아.”
“레베카도, 너도 둘 다 내가 지킨 거야. 지킬 수 있어서 지금 와서는 한 점 후회도 없어. 문제는….”
짧은 침묵 후에 아멜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배 속에 아이가 있어.”
순간적으로 아멜리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그 말이 전해 준 충격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니까, 아멜리아의 배 속에 아이가 있다고. 그것도 카스트로의….
엘레나는 아멜리아의 순한 얼굴과 납작한 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눈물의 전조처럼 떨렸다.
“맙소사, 아멜리아….”
차마 너 괜찮으냐고, 마음 다치진 않았느냐고…. 치밀어 오른 걱정을 곧이곧대로 입 밖으로 내뱉을 수조차 없었다. 당연히 괜찮지 않을 것을 아니까. 감히 어떤 위로를 건네려고? 위선도 이런 위선이 없었다.
아멜리아는 엘레나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수치심에 달아오른 양 귓가가 발갛다.
“태는 진작 망가졌지만, 약은 꼬박꼬박 챙겨 먹었어. 전하께서 거의 결벽적으로 감시하셨으니까. 게다가 그전부터 난 임신이 불가능한 몸이었잖아. 너도 알다시피 선천적으로 몸이, 아주 약해서….”
엘레나는 탄식을 터트렸다. 사실 이런 경우 쥐도 새도 모르게 아이를 지우는 것이 최선이었다. 자신을 강간한 사람의 아이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뻔한 불구덩이였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배 속의 아이는 에스페다의 직계 황족이었다. 그것도 귀족인 어미와 황태자인 아비 사이에서 잉태된. 제대로 태어난다면 에스페다의 황위 계승권자로서 인정받아야 마땅했다.
엘레나는 겨우 입술을 뗐다.
“아멜리아. 그, 애는….”
“낳지 않을 거야.”
아멜리아의 목소리에선 필사적인 선득함마저 느껴졌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야. 내가 아이를 잉태했다는 것을 황후 폐하께서 눈치채시기 전에 내가 사라져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