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51)
  • 그들이 쌓은, 그러니까 카스트로 혼자서 쌓은, 일방적인 추억에 대한 확인.

    몇 시간의 지난한 확인이 끝나고 나서야 그는 그녀가 엘레나라는 것을 가까스로 인정했다.

    “전하, 오늘은 이만 물러감을 허락해 주세요. 제가 너무 피로해서….”

    “네가 갈 곳이 어디에 있어서. 내 침실로 가.”

    “그러다 제가 몸을 되찾으면요.”

    “…….”

    “저의 처음은 언제나 전하의 것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렇게 하자 있는 상태로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돌아갈 수 있다고.”

    그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을 때 카스트로가 보였던 반응이란.

    절대로 그럴 수 있을 리 없다는 경악이나 부정 대신, 묘하게 수긍하는 기색.

    ‘그 반응으로 봐서는… 몸이 있는 곳을 카스트로가 알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엘레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급하게 생각하고 싶진 않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은 늘 그녀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아직까지는 비센테를 위해 그녀가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우선, 바섬 백작 부인과의 협상에서 그가 우위를 점하게 하려면 3황자 이안에 대한 정보를 찾아야 했다. 두 번째로 군의 배치 등 내부 정보를 최대한 많이 모아야 했고, 세 번째로는 귀족원의 동태를 살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했다.

    ‘귀족원의 입장은 아직까지는 어느 한쪽으로 쏠리진 않은 것 같아.’

    의식을 잃은 황제를 황태자의 기사들이 둘러싼 현 상황은 실질적 반역이었으나, 귀족원에선 이례적으로 어떤 성명조차 내지 않은 채 잠잠했다. 가장 대놓고 목소리를 높여야 할 현 황제의 측근들조차….

    결국 카스트로가 여전히 ‘황태자’이기 때문이다. 대체할 만한 정당성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3황자는 죽었고, 바섬 백작 부인의 배 속 아이는 제대로 탄생할 수 있을지조차 확신이 어려웠다.

    더구나 비센테는 현재 칩거 중이었다. 황좌에 욕심이 있다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사람이, 어떤 의사조차 표명하지 않고.

    ‘엔리케가 초조해하던 것도 이해가 가.’

    아마 내부적으로 혼란이 극심한 상황일 터다.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황제가 승하하면, 자연스럽게 카스트로가 차기 황제의 자리에 오를 테니까….

    결국 이 상황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면 비센테가 하루라도 빨리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는 게 우선이었다.

    ‘엔리케가 말했던 대로 황태자가 반역을 저질렀다는 성명을 내는 게 우선이야. 우리가 확보한 귀족원 의원들 절반이 그 의견에 동조할테고, 그러면 군소 귀족들도 따라붙겠지.’

    그녀는 비센테에게 옮아 온 버릇대로 테이블을 톡, 톡 쳤다.

    ‘카스트로도 바섬 백작 부인이 황제께 독을 먹였다고 받아칠 테지만, 비센테를 직접적으로 공격할 명분은 없어. 표면상, 황제를 보호하고 있는 것은 비센테의 기사가 아니라 바섬 백작의 기사인 셈이니까.’

    영리하게도 반역의 혐의는 빗겨 가면서, 황제를 반역의 무리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군을 이동시킨다는 명분을 획득한 셈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귀족들이 눈치만 보면서 기다리고 있는 건, 누구의 군대가 더 먼저 황궁을 장악하느냐인데.’

    엔리케가 발 빠르게 처신했다면, 비센테는 지금쯤 수도를 떠나 군대를 집결시킬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터였다. 그가 빨리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좋았다.

    카스트로는 그녀의 정체만으로도 적잖이 혼란스러워 보였고, 그의 부관들은 그녀가 들고 온 정보의 진위를 따지려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그리고 기습은, 언제나 상대방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파고드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그러니까 가령….

    “저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엘레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문간에서 아멜리아가 주춤거리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가지도, 완전히 그녀에게 붙어 서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였다.

    엘레나가 바라보는 동안에도 아멜리아는 한참 동안 입술만 달싹였다. 차마, 제 입으로 묻기조차 어렵다는 듯.

    “정말….”

    “정말 내가 엘레나가 맞느냐고, 그렇게 물으려던 거죠?”

    겨우 입술을 떼기 무섭게 질문을 낚아채듯 물었다. 아멜리아는 눈을 부릅뜬 채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그녀의 충격적인 고백을 들은 이후로, 아멜리아는 가엾게도 부쩍 여위었다. 고작해야 몇 시간 만에 이렇게 변했다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멜리아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지만, 눈가에는 물기조차 없었다.

    “말, 해 줘요.”

    엘레나는 말없이 아멜리아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어둑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축 처진 어깨, 떨리는 입술, 회동그랗게 뜬 눈과 핏기 없는 뺨….

    과거의 그녀는 활짝 핀 아멜리아를 알았다. 수줍어하는 아멜리아도 알았다. 기뻐하는 모습도, 슬퍼하는 모습도, 분개하고, 웃고, 떠들고, 춤을 추는 아멜리아도 알았다. 그 모든 순간마다 아멜리아에게는 생동감이 넘쳤다.

    지금처럼,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모습이 아니라.

    “…….”

    진실을 밝히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카스트로에게 거짓을 고한 척 사실을 숨기는 편이 좋을지…. 무엇도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엘레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멜리아를 위해서.

    아멜리아가 감추고 싶어 할 비밀을 ‘이벨린’으로서 지나치게 많이 목도한 까닭이었다. 섬세하고 풍부한 감정을 지닌 아멜리아로서는, 죽어도 보이기 싫은 수치스러운 모습까지….

    엘레나는 입술의 끄트머리를 조금 짓씹었다.

    “당신은 내가 무엇이었으면 좋겠어요?”

    “…네?”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해도 좋다는 소리예요. 내가 엘레나라고 생각하든, 당신에게 고백한 대로 유령을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든. 편할 대로요.”

    “편할 대로라면.”

    “그러니까, 당신 마음이 편한 쪽이라면, 저를 무엇으로 생각하든….”

    “엘레나.”

    그녀의 말 어디에서 확신을 얻었는지, 아멜리아의 눈빛이 달라졌다. 먹먹하게 차오른 감정을 가까스로 삼킨 그녀가 한걸음에 방을 가로질렀다. 양손으로 엘레나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너구나, 정말.”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감정이 아멜리아의 작은 얼굴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래, 이제… 이해가 가. 너니까, 그럴 수 있었던 거구나….”

    “…….”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는 묻지 않을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 내게도 너무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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