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151)
  •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주제에, 제게 돌아오고 싶었다는 입바른 말엔 순식간에 흡족해져서는. 그녀를 의심할 생각조차 못 하는 절박한 얼굴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녀는 카스트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자잘한 신음을 삼키며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네 그 눈이 그리웠어. 그렇게 날 똑바로 보는 눈이.”

    “…….”

    “그 얘길 내가 했던가. 더는 참기가 어렵군. 누가 뭐라고 하든 당장 널….”

    “네, 전하. 벌써 여러 번 하셨어요.”

    그녀는 카스트로의 말을 끊으며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말을 뱉기 위해선 그녀가 가진 모든 용기를 모조리 끄집어내야만 했다. 침착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제가, 엘레나니까.”

    순간적인 정적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공기마저 묵직했다. 카스트로가 무심결에 문간에 서 있던 아멜리아를 돌아보자, 아멜리아 또한 희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혹, 경악, 황망함, 혹은 의심.

    “…뭐?”

    그가 조급하게 그녀를 몰아세웠다. 당장 설명해 보라는 듯 제가 쥐었던 팔에 더 아프게 힘을 실었다. 엘레나는 그에게 잡힌 제 팔이 거의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

    “죽었다가 깨어나 보니 이 몸이었어요. 에스페다의 언어를 브리타냐어로 번역하며 살았는데, 2황자 측 사람이 찾아오더군요. 사교계를 속이고 전하의 눈을 가리는 일에 동참하면 평생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게 해 준다더군요.”

    한 줌의 진실은 언제나 거짓을 더 그럴듯하게 만들어 준다. 카스트로는 이제 숨도 쉬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절할 필요가 없었죠. 사실 에스페다로 돌아올 수만 있었다면 무엇이든 했을 거예요.”

    “…….”

    “저는 2황자에게 복수하고 싶었으니까.”

    카스트로의 순간 눈에 번뜩이는 이채가 어렸다. 엘레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카스트로의 가슴팍을 의도적으로 느리게 매만졌다.

    “하지만 제 주변엔 2황자의 눈과 귀가 항상 붙어 다녔죠. 그는 저를 믿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제가 엘레나라는 것을 알게 되신 모양이더군요.”

    그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욕설을 짓씹어 내뱉었다. 이미 그녀의 말에 절반 이상 넘어온 것처럼 시시각각 절박해졌다.

    “…계속해 봐.”

    “거짓으로 둘러댔지만 결국 들키고 말았죠. 그가 지하 감옥으로 사람을 보냈을 때, 저는 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려 있었어요.”

    말을 거듭할수록 거짓은 매끄럽게도 입에 붙었다. 그녀는 제가 이렇게까지 담담할 수 있다는 게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조차 이용하기 좋은 패쯤으로 여기는, 카스타야 후작이 평생에 걸쳐 공들여 깎아놓은 성정 덕분일 것이다. 비센테는 아주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그래, 비센테. 그를 떠올리며 그녀는 가까스로 용기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회라고 생각했죠. 2황자는 은신처를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거든요. 지명 수배자를 빼돌린다면 당연히 그쪽으로 가리라고 생각했고, 제 짐작이 맞았죠.”

    “…….”

    “저는 거기에 머물면서 신뢰를 얻어 냈어요. 그리고… 결국 이것을 가져왔죠.”

    그녀는 카스트로에게 붙잡히며 놓치고 만 가방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녀의 발치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던 가방을, 카스트로가 천천히 주워들었다.

    엔리케가 준비해 준 자료들을 그녀는 밤을 새워 처음부터 다시 필사했다. 그녀가 가져온 ‘정보’는 비센테 몰래 빼돌린 것으로 되어야만 하니까. 이번엔 굳이 필체를 바꿀 필요도 없어 빠르게 준비할 수 있었다.

    그녀의 필체조차 엘레나라는 증거 중 하나가 될 테니까.

    “이건….”

    카스트로는 말문이 막힌 얼굴로 서류를 한 장씩 넘겨 보았다. 그녀는 카스트로가 이미 절반 이상 그녀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거짓으로 작성된 것이라고 치기엔, 정보들의 질이 하나부터 열까지 그럴듯할 테니까. 결국 이번에도 같은 속임수였다. 거짓들 속에 대단치 않은 진실 한 줌을 섞는 것.

    “이거면 전하를 향한 제 마음의 증거로 충분할까요?”

    “…마음이야 그렇다 치고.”

    그가 복잡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네가 엘레나라는 건… 말이 안 되는데.”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한 의심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왼 팔뚝의 안쪽, 오른쪽 눈썹 위, 배꼽에서 오른쪽으로 한 뼘 빗긴 위치, 그리고 왼쪽 발목 부근에… 핏줄이 터져 점처럼 굳어진 흉터가 있어요. 발등엔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고요.”

    사람을 속이기 위해선, 자기 스스로도 속여야 했다. 그럴듯한 동기를 내세우고, 증오를 앞세워 호소하고,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하고,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을 심어주는 것.

    평소의 카스트로라면 그녀의 태도가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알아차렸겠지만, 그는 늘 ‘엘레나’에게 약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제 약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할 그를 알았다.

    “카스트로.”

    그녀가 어린 시절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며 한 걸음 더 가까이 붙자, 카스트로가 움찔 뒤로 물러섰다. 내내 그들의 관계를 구걸해 온 것이 그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나를 봐. 이런 몸에 갇혀 버리고 만 나를 좀 봐.”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호소는 어지간한 사내라면 깜빡 넘어갈 지경으로 애처로웠다.

    “나는 날 죽인 사람이 멀쩡히 사는 꼴을 볼 수가 없어. 날 죽인 그를 내가 어떻게 용서하겠어. 너는 내게 미래를 약속했는데, 내가 살 수 있는 삶을 보장했는데.”

    “…….”

    “서쪽 탑에서 내 아비의 죄를 너만은 용서하겠다고 말했잖아. 내가 태를 망치는 약을 얌전히 받아 마시기만 하면 날 구하겠다고 말했잖아.”

    엘레나의 눈에 서늘한 핏발이 섰다. 스스로를 향한 혐오감이 도리어 그녀의 말을 더 진실하게 들리도록 만들었다.

    더구나 그녀가 입에 올리는 것은, 엘레나가 아닌 이상에는 알 수도 없는 내용이었다. 카스트로는 얼떨결에 긍정했다.

    “…그랬, 지.”

    “그자의 목만 가져다주면, 너를 위해 무엇이라도 하면서 살게. 네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할 테니까….”

    엘레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늘게 새어 나온 핏줄기가, 흐르기도 전에.

    “비센테를 죽여, 카스트로.”

    ***

    엘레나는 아멜리아의 손에 이끌려 황태자비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엘레나’이던 시절, 그녀가 머물렀던 곳이니만큼 풍경은 익숙했다. 그녀가 유폐된 그 순간부터 지금껏 배치를 바꾸지 않은 모양이었다.

    익숙한 만큼 지겹고 끔찍해야 마땅했지만, 무엇도 제대로 느껴지진 않았다.

    ‘피곤해….’

    벌써 새벽녘이었다. 카스트로는 그녀에게 많은 질문을 퍼부었고, 그때마다 그녀는 적절한 대답을 내놓았다. 대부분은 과거의 일에 대한 확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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