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51)
  • 사람은 가끔은 이목구비보다 입고 있는 옷이나 화장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니까. 그것도 ‘이벨린 로즈 레녹스’처럼 온몸에 최고급품을 둘둘 말고 다니던 여자라면 더더욱.

    ‘이벨린’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때의 가짜 백작 영애와 지금의 그녀를 연관 짓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소문 들었어?”

    빠르게 놀리던 발걸음이 느려진 건 황태자 궁의 계단 앞에서였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 몇이 저들끼리 지껄이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려왔다.

    “무슨 소문?”

    “그 왜, 요즘 떠들썩했던 사기꾼 말야.”

    “그 무슨 브리타냐 출신의 백작 영애라던가 하는?”

    “그래. 그 여자. 소문을 듣자니 벌써 수도를 빠져나갔다는 것 같더라고.”

    “뭐? 지금 우리 궁 기사의 절반이 죄다 관문으로 차출된 게 그 계집 하나 찾기 위해서잖아. 그러면 그 난리가 다 헛고생이라는 거야?”

    그 염가의 대화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하나뿐이었다. 황태자의 기사들 중 절반이 황궁 밖에 차출되어 있다는 것. 그것도 그녀를 찾기 위해서….

    “아, 글쎄. 그렇대도. 북쪽으로 가는 마차를 타는 걸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잖어.”

    “이를 어쩌냐. 황태자 전하께서 아주 푹 빠지신 모양이던데.”

    “그 계집이 아주, 응? 그걸 끝내주게 잘하나 봐.”

    한 명이 저열한 손놀림을 하자 저들끼리 숨죽인 웃음소리를 냈다. 그들이 가까워지자, 모여 있던 셋 중 한 명이 옆구리를 툭 쳤다. 누가 오니 입조심을 하라는 신호였다.

    유독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그녀는 후드를 조금 더 바짝 붙잡아 얼굴을 가렸다.

    “혹시, 아직 궁 안에 있는 거 아냐? 하녀 중 하나로 변장해서….”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병사가 건들거리며 입을 놀렸다. 엘레나의 표정이 순간 뻣뻣하게 굳기 무섭게, 타박이 날아들었다.

    “야, 야. 갑자기 무슨 그런 헛소릴 다 하고 그래.”

    옆구리를 찔린 병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어물거렸다.

    “야야, 농담도 못 하냐? 당연히 그냥 한 소리였지….”

    “지나가십시오, 시녀님.”

    아멜리아가 차가운 눈으로 그들의 면면을 훑자, 그들은 헛기침을 하며 저마다 시선을 돌렸다. 엘레나는 가방을 바짝 움켜쥔 채로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궁 내부에는 하녀들 몇을 제외하곤 상주하는 인원들도 최소한으로 줄어든 것 같았다.

    적막하고, 고요했다. 비단 황태자의 궁뿐만 아니라, 사실 황궁 전체의 공기가 팽팽하게 날이 서 있었다.

    ‘황제께서 쓰러진 게 극비리에 붙여졌다고 하지만 백작 부인의 별궁을 두고 양측 기사단의 대치가 한창일 테니까….’

    눈치 빠른 자들은 아마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 정도는 파악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쯤 권력의 판도가 명확해질 것인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터였다.

    귀족원은 연일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어느 쪽이 더 정당성을 갖추었는지 의미 없는 토론이나 거듭하겠고.

    결국,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명분이었다. 그들이 보다 더 정의로운 쪽에 헌신하고 있다는 알량한 믿음.

    “이벨린.”

    “…….”

    “이벨린!”

    그녀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황태자의 집무실 바로 앞이었다. 아멜리아가 제발 정신 좀 차리라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도착했어요. 준비는 됐어요?”

    요 며칠, 비센테에게 본래 이름으로 불렸다고 벌써부터 ‘몸’의 이름이 어색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으로 가방을 꼭 움켜쥐었다. 아멜리아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짧은 허락이 떨어졌다.

    “들어와.”

    이윽고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렸다. 어두운 복도로 급작스럽게 쏟아지는 환한 불빛에 엘레나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시야를 잠깐 놓쳤다. 그래서 목소리부터 들렸다.

    “아하…. 이게 누구야.”

    엘레나는 빛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이윽고 집무실의 풍경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카스트로는 책상을 삐딱하게 짚은 채로 서 있었다. 평온한 표정이나 목소리와 달리 손은 피투성이었고, 온 사방이 깨진 가구 파편이 가득했다.

    성질이 날 때마다 방을 뒤집어엎는 건 제 어미인 가브리엘라 황후를 꼭 빼닮았지….

    그녀는 그 패악을 짐짓 모르는 척하며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붙잡아 내렸다.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그녀의 태연한 인사에 카스트로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여유가 남아 있던 척하던 가면조차 집어던지고 재빨리 방을 가로질렀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아프게 잡아 올렸다.

    “대체 어디 갔었어.”

    “…아픕니다, 전하.”

    “누가 널 빼돌렸었느냐고 묻잖아.”

    그녀의 얌전한 말씨를 잘라먹듯 재차 으르렁댔다. 그녀는 아주 일그러진 카스트로의 초록색 눈동자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아시잖아요.”

    “네 입으로 말해.”

    “비센테 전하께서 사람을 시켜 저를 꺼내 주셨어요. 저는 거절하지 못했고요.”

    “…….”

    “그때는, 그게 절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그 자식을 따라갔다고.”

    “전하께서는 당장 제게 신경 쓰기 힘드실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제 존재가 부담이 될 거라고만.”

    그는 아주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입매를 뒤틀었다. 그러나 무엇도 부정하지는 못했다. 황후에 의해 손발이 묶인 뒤로, 카스트로가 억류된 그녀를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도 없었다.

    이렇게 방이나 때려 부수며 패악이나 부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저는 살고 싶었어요, 전하.”

    사실은 죽고 싶었다. 엘레나는 증오를 겨우 삼키며,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카스트로의 뺨을 살짝 쓸었다.

    그는 무엇부터 터트려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도 제게 닿은 그녀의 손을 착실히 옭아매는 집착이 돋보였다.

    “비슷한 상황에서 두 번 실수하기는 싫었거든요.”

    “…….”

    “이렇게 전하께, 돌아오고 싶었으니까.”

    “내게 돌아오고 싶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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