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아파? 미안해. 내가 제대로 잡아 주었어야 했는데.”
“전하께서, 잘못하신 게, 훌쩍, 아니에요….”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 없게 할게.”
“…거짓말.”
“정말이야. 두 번 다시 이렇게 아플 일 없을 거야. 평생, 내 무엇을 걸어서라도 널 지킬 테니까.”
입술이 떨렸다. 이 기억을 왜 잊고 있었지? 물론 변명이야 충분했다. 그들은 지나치게 어렸고,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더 큰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으니까….
엘레나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의 목숨은 한 번 완전히 끊어졌다가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 몸을 되찾으면 맹약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할 거예요. 운이 좋다면, 아가씨의 운명도 사라지겠지만….”
“…….”
“확실한 건 더는 무엇도 돌이킬 수 없어요.”
그녀에게 얼굴을 바짝 가져다 붙인 힐다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힐다의 눈은 엘레나를 바라보는 것 같으면서도, 바라보지 않는 것 같았다. 엘레나는 힐다의 얼굴에서 온전한 두려움을 읽어 냈다.
희망도 없이 어둑하게 가라앉은 눈.
“흘러가는 대로 끌려가면 무엇도 선택할 수 없어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잡으세요. 그게 유일한 희망이니까….”
“…….”
“부디, 조심하세요. 아가씨.”
***
엘레나는 창가에 이마를 붙이고 서서 멀어지는 힐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곁에 조금 더 있어줄 수 없겠냐는 요청에, 힐다는 제 존재가 운명을 뒤틀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했다.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도저히 붙잡을 만한 핑계도 없었다.
혼자 남겨지게 되자 지독한 외로움과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확실해진 것은 어떤 것도 없었다.
몸을 되찾게 된다면야 좋겠지만, 그녀는 제 몸이 지금 당장 어디에 있는지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카스트로? 아멜리아? 당장 황궁에 갈 방법도 없거니와 제 몸이 황궁에서 보관되고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이벨린 아가씨.”
그녀는 열없이 창가에서 고개를 떼고 몸을 돌렸다. 어느새 엔리케가 문간에 서 있었다. 몇 주 만에 본 엔리케의 얼굴은 그녀가 여태껏 봐 왔던 그의 모습 중에 가장 초췌했다. 피로, 걱정, 초조, 분노….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그의 눈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이 보였다. 엔리케는 심지어 그녀에 대한 반감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제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요.”
“길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분노를 죽이려는 것처럼 제 얼굴을 마른 손으로 한 번 쓸어내렸다. 성큼성큼 방을 가로지른 그가, 방의 중앙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녀가 앉기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당장 전하의 곁에서 떠나 주십시오.”
엘레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엔리케가 그녀를 찾아온 시점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엔리케에게는 아주 당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성공을 목전에 두고 가장 중요한 당사자가 칩거한 상황일 테니까. 심지어 여태껏 준비했던 계획을 하나씩 무위로 돌리며….
“제가 왜 그래야 하죠?”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가 침착하면 침착할수록, 엔리케의 얼굴은 분노로 붉어졌다가 새하얗게 변하기를 반복했다.
세상에 이렇게까지 뻔뻔한 계집은 처음 본다는 듯, 저 대단한 책사가 제 낯짝조차 살피지 못한 채로.
“…….”
힐다는 몸을 되찾기를 종용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였다. 어차피 곧 소멸할 텐데, 그 잠깐의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에는 본능적 반감이 치솟았다.
물론, 그깟 감정 때문에 엔리케에게 이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엘레나를 쏘아보았다.
“왜 처음 봤을 때부터 당신이 거슬렸는지, 이제 좀 알 것 같군요. 본능적으로 우리의 계획을 망칠 사람이라는 걸 알아봤던 거겠죠.”
“…….”
“하, 참. 제가 치명적인 부분을 간과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한낱 사내라는 사실을요. 여자에게 홀려 어디까지 분별을 잃으실 작정이신지….”
“전하께 실례되는 언사를 하시는군요.”
“저도 믿기지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성적이셨던 분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황제 폐하께서 의식 불명 상태입니다.”
“…뭐라고요?”
그녀는 침착하게 행동하리라고 마음먹었던 것도 잊고 동요를 내보였다. 순간, 엔리케가 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그의 목소리가 그녀를 회유하려는 것처럼 부드럽게 잦아들었다.
“만찬 도중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습니다. 정황상 독을 섭취하신 것 같고요. 바섬 백작 부인께서 곧바로 폐하를 별궁으로 모셔서 보호 중입니다. 우리 측 기사들이 별궁을 지키고 있지만, 그 바깥을 황태자의 기사들이 에워싼 실정입니다. 그 전력조차 파악이 어렵고요.”
“…….”
“당장이라도 무력 충돌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입니다. 황태자가 실질적 반역을 저지르고 있지만, 비센테 전하께서는 이 기회를 붙잡을 생각조차 없으시고요.”
“실질적, 반역이라고요.”
“예. 지금 황태자가 군을 움직여 백작 부인을 치고, 폐하께서 승하하시면 끝입니다. 그러면 무엇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비센테 전하께서는….”
그녀는 아찔한 현기증에 가까스로 창틀을 붙잡고 섰다. 구구절절 이어지는 엔리케의 말은 더 들리지도 않았다.
황제가 쓰러졌다. 그리고 그가 죽으면, 카스트로가 황제가 된다.
충격으로 새하얗게 굳었던 머리가 다시 냉정한 계산을 되찾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엔리케를 바라보는 엘레나의 눈에 서늘한 빛이 어렸다.
“그래서요. 굳이 이 상황에서 저를 찾아온 이유가 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