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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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자리를 봐 드릴까요?”

    비센테가 나가자마자 거의 교대하듯 하녀가 다시 돌아왔다.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아래층에 그녀가 애타게 찾았던 힐다가 와 있다니. 그녀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요. 잠을 너무 오래 잤는지, 피곤하지가 않네요. 숄을 좀 가져다줄래요? 아래층에 내려가려고 하는데.”

    “그럴게요. 아, 그리고 누가 찾아왔어요.”

    하녀가 머뭇거리며 속삭인 소리에 엘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요?”

    “모르겠어요. 황자 전하와 친분이 있으신 분 같긴 했어요. 두 분이 대화를 나누는 걸 봤거든요. 하여튼 전하께는 비밀로 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셔서…. 이걸 아가씨께서 전해 주면 아가씨는 알 거라고 하셨어요.”

    하녀가 내민 것은 반쯤 구겨진 쪽지였다. 펼쳐보니 다급하게 휘갈긴 글씨가 나타났다. 그녀에게는 아주 익숙한 필체였다. 엔리케.

    당신께 전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E-

    “이걸 전해 달라는 사람이 지금 와 있다고요?”

    “네. 뒷문에 계세요. 황자 전하께서 오시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오셨거든요.”

    “…우선 이분을 응접실로 안내해 줘요. 전하껜 상황을 봐서 제가 말씀드릴 테니까, 일단 비밀로 해 주시고요.”

    “그럴게요.”

    그녀는 하녀가 가져다준 숄로 몸을 폭 감쌌다. 겨우 기력을 회복한 몸인데도 움직이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서 바로 오른쪽은 힐다가 머무는 손님방이었고, 왼쪽은 응접실이었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방향을 정했다.

    “힐다. 들어갈게.”

    방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잠이 들었다가 그녀의 목소리에 퍼뜩 깨어난 모양이었다.

    엘레나는 힐다가 옷차림을 정돈할 수 있도록 얼마간 시간을 두고 문을 열었다. 노파는 피로에 젖은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박거리다가, 초췌한 몰골의 그녀를 마주하곤 얼어붙었다.

    “오….”

    아주 당혹스러워하는 시선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힐다는 그녀의 야윈 몸을 보고 한동안 말조차 잇지 못했다. 차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매만졌다. 힐다의 주름진 얼굴이 일그러졌다.

    연거푸 탄식을 터트리던 힐다가 와락 그녀의 팔뚝을 붙잡았다.

    “아가씨도 느끼시겠지만,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어요. 당장 본래의 몸을 되찾으셔야 해요.”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이제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우선 아가씨 몸이 어디에 있는지 아셔야 해요. 다음은, 아가씨의 영혼이 다시 길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해요.”

    엘레나는 막막한 숨을 터트렸다. 힐다의 말은 여전히 수수께끼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난 이제 지명 수배자가 되었는걸.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조차 없어.”

    힐다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가씨 일은 신문을 통해 봤어요. 제가 도움이 된다면 좋을 텐데. 제게 주어진 힘으로는 이것보다 더 큰 미래를 읽을 순 없어요. 그 이상은 제게 허락되지 않았어요.”

    “이 상태로 내가 계속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지?”

    “달거리를 계속 거르고 계시죠?”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을, 힐다는 다시 질문으로 되돌려 주었다.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어떻게….”

    “그 여자는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살아 있지 않아요. 아가씨의 영혼마저 떠나면 더는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그 여자.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그녀의 혼을 담은 ‘이벨린’의 몸. 충격적인 말에 엘레나의 손이 조금 차가워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하기엔 여태껏 있었던 묘한 증상들이 착착 맞아떨어졌다.

    엘레나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무슨 소리야, 그게….”

    “정신 단단히 잡으셔야 해요.”

    힐다는 휘청거리는 그녀를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엘레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몇 번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이벨린’의 몸이 지금처럼 어색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좀처럼 진정할 수가 없었다.

    “일단, 그렇다고 치고.”

    그녀는 간신히 평정심을 회복했다. 지금은 고작 이 정도 충격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내게 걸려 있는 축복인지, 저주인지 때문에 비센테 전하의 시간이 반복되고 있어. 그게 그분과 연관이 있어?”

    “에스페다 초대 건국제는 아주 위대한 용의 혈통을 계승했어요. 그자는 시간의 축을 제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었죠. 그리고 그런 강력한 힘은 보통 피를 매개로 직계 혈족에게 전해져요.”

    “…….”

    “2황자 전하께선 그 힘을 유독 짙게 물려받으셨고, 맹약이 진행된 장소는 하필이면 오스티나토의 엘 레테아 신전이었죠. 다른 곳이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그 땅에 남아 있던 마지막 마력이 2황자 전하의 의지에 응답했어요.”

    마지막 마력. 사건의 진상이 이제야 어렴풋이 보였다.

    “아가씨와 2황자 전하께서 맺은 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계약이에요. 아가씨께선 스스로의 피로 제물이 되셨고, 2황자 전하는 아가씨께 수호의 맹세를 하셨어요.”

    “…하지만 난 그런 기억이 없는걸.”

    “잊으셨을 수도 있죠. 어떤 사람도 여섯 살 무렵 있었던 일을 전부 기억할 수는 없으니까요.”

    과거를 회상하는 힐다의 눈에 얼마간의 온기가 돌아왔다.

    “맹약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에요. 의지를 입 밖으로 내는 것만으로도 성사되죠.”

    “…….”

    “흔히들 하는 지켜 주겠다는 말이, 우연히 그렇게 되기도 하고요.”

    힐다의 말을 듣고 어렴풋이 생각나는 장면이 있었다. 여섯 살 무렵, 엘 레테아 신전의 정원, 다쳐서 피를 흘리는 그녀에게 손가락을 걸고 평생을 약속하던 비센테, 그녀만큼이나 앳되고 미숙하던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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