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51)
  • “고마워요. 제가… 며칠이나 잠들어 있었죠?”

    “나흘쯤 되셨어요. 중간중간 의식을 되찾기도 하셨는데, 금방 다시 잠드셨고요.”

    “…나흘이나요?”

    “식사부터 준비해 드릴게요. 삼키기 부드러운 것으로요. 그러는 동안 물수건을 데우면 딱 맞겠어요.”

    하녀는 차분하게 엘레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순서대로 해치웠다. 그녀는 건더기를 곱게 간 수프를 절반 정도 비웠고, 따듯한 물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정신이 바짝 들 정도로 뜨거운 물에 온몸을 푹 담그고 싶었는데, 체력이 부족해 어쩔 수 없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로 돌아가기 무섭게 방문이 열렸다.

    “의식을 찾았다고 해서….”

    급히 뛰어온 듯 비센테의 숨은 조금 거칠었다. 그가 침대의 끄트머리에 앉자, 하녀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섰다.

    둘만 남겨지게 되자 순간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는 애써 건강을 회복한 그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아주 조심스러워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엘레나는… 차마 비센테의 눈을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

    그가 저를 위해 어디까지 희생했는지 이제 안다. 무슨 낯으로 그를 마주해야 할까. 대체,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엘레나. 왜 그래?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어?”

    그가 덜컥 초조해진 얼굴로 그녀의 야윈 손목을 부드럽게 쥐었다. 엘레나는 가까스로 웃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조금 힘들었나 봐. 계속 아팠잖아.”

    “금방 나을 수 있을 거야. 이 지긋지긋한 나라만 벗어나면…. 이제 거의 다 됐어.”

    “…정말 전부 다 버리고 떠나게?”

    “그래.”

    그가 그녀의 손등을 붙잡아, 제 뺨에 아프지 않게 내리눌렀다. 그녀만 있으면 모든 게 족하다는 듯, 생에 더 바랄 것도 없다는 듯. 그의 단단한 입술이 그녀의 손등에 몇 번이고 닿았다.

    저 얼굴을 보고도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어쩐지 눈물부터 치밀었다. 그녀는 겨우 입술을 깨물어 감정을 삼켰다.

    “…나는, 모습도 달라졌는데.”

    “그래도 너잖아.”

    “나, 정말 너한테 줄 것 하나도 없어.”

    “바란 적 없어.”

    “대단히 예쁘지도, 재물이 많지도, 권력이나 명예도 없어.”

    “언제는 네가 나보다 대단했던가.”

    그녀는 울음을 참던 것도 잊고, 기막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장난스러운 웃음이 희미하게 묻어났다.

    “그때와 내가 같은 거라곤 상처투성이 영혼뿐인데… 그래도 내가 좋아?”

    “그래. 엘레나.”

    그가 그녀의 뺨을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쌌다.

    “내게는 언제나 그것만으로 차고 넘쳐.”

    확언이었다. 머뭇거림이나 주저함도 없이. 그가 돌이킨 모든 세월과 온 생, 마음을 다 바친 고백이었다. 확신에 찬 청보라색 눈동자가 그녀를 올곧게 응시했다.

    “나는 네게서 무엇도 가져가지 않아. 네가 주고 싶은 것만 줘도 상관없어. 내키지 않으면 아예 주지 않아도 되고.”

    “…….”

    “나는 다만,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

    숨이 멎었다. 혹은, 숨이 멎었다고 생각했다. 망연한 얼굴로 굳은 그녀의 표정에 그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그녀의 코끝에 제 콧잔등을 가볍게 가져다 댔다. 도저히 그러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듯.

    “그러니 그대가 나를 가지는 것으로 해.”

    “…….”

    “가끔씩 내가 가여워지면 돌아봐 주고.”

    가여워하다니. 그를? 제가 감히? 다분히 계산적인 말이라는 걸 알아도, 도저히 저항할 방법이 없으니 문제였다.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휩쓸렸다.

    “또 우네.”

    “그냥, 기뻐서….”

    “울지 마. 네가 울면 정말 어쩔 줄 모르겠으니까.”

    “…항상 그랬어?”

    “그래. 항상 그랬어.”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젖은 뺨을 쓸었다.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입술을 얽지는 않았다. 고작 육체적인 욕망으로 흘려보내기엔 이 환희가 너무 아까웠다.

    돌고 돌아서,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게 된 지금의 이 순간이.

    그녀는 제 손으로 그의 양 뺨을 감쌌다. 그녀의 손을 따라 수그러든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댔다. 그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 아래, 시리도록 아름다운 눈동자도.

    “조금 더 이러고 있고 싶긴 한데, 엘레나, 네 몸이 너무 차갑다.”

    “나 괜찮은데.”

    “그러다 또 아프려고.”

    그가 손에 잡히는 이불을 끌어다가 그녀의 작은 몸을 폭 감쌌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꼼꼼히 귀 뒤로 넘겨 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정리해야 할 일이 좀 더 남아 있어서 이제 가 봐야 해. 너 자는 것까지 보고 가고 싶긴 한데.”

    “잠이 안 올 것 같아.”

    “그래. 아주 많이 잤으니까. 그래도 네가 다시 잠들기 전엔 돌아올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무리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네 힐다를 찾아서 아래층 손님방에 데려다 두었어. 이틀쯤 됐고. 널 먼저 만나기 전에는 내게 할 말이 없다더군. 네가 만나고 싶을 때 만나 봐.”

    “…힐다.”

    “너무 늦지 않게만 해. 일주일 뒤면 우린 에스페다를 떠날 테니까.”

    “…….”

    기쁘게 벅차올랐던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닥친 현실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소멸. 그리고, 카스트로의 손에 있을 ‘엘레나’의 육체.

    잠깐이라도 그것을 잊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조금 이따가 봐.”

    그녀가 설핏 굳었던 것만으로도, 못내 불안한 눈을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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