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51)

엘레나는 제 손목을 붙잡는 손에 화들짝 놀라 몸을 틀었다. 2황자, 비센테였다. 그녀는 다소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서약식이 시작되기 직전이었고, 그는 도열한 기사들의 가장 앞쪽에 서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숨을 조금 헐떡이고 있었다. 신의 걸작이라고 불리는 얼굴을 험악하게 구긴 채로.

그녀와 같이 서 있던 영애들이 놀란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엘레나는 불편함을 느꼈다.

“2황자 전하. 저를… 찾아오신 게 맞을까요?”

엘레나로서는 그렇게 묻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제 그가 부채를 주워 주는 일이 있긴 했지만, 그들 사이엔 이럴 만한 유대감이 없었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동시에 아주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무언가를 묻고 싶은 듯 달싹거리던 입술이 뻣뻣해졌다. 그제야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모양이었다.

“…….”

이윽고 맥이 풀린 것처럼 그가 그녀의 손목을 힘없이 놓아주었다. 여전히 속으로는 무언가를 애써 삼키는 것 같은 얼굴로.

“제 착각으로… 후작 영애께 실례를 범했군요.”

“…….”

“제가 찾는 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녀는 조금쯤 안도했다. 그가 어제 있었던 일을 스치듯 언급하기만 했어도, 순식간에 온갖 추문이 생겨났을 테니까. 그러면 온종일 카스트로의 끈덕진 추궁에 시달리는 미래가 뻔했다.

비센테는 정중하게 예를 갖춰 인사하고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곁에 서 있던 영애들이 호들갑스럽게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아무래도 2황자 전하께서 누굴 찾으시는 것 같죠?”

“카스타야 후작 영애와 착각했다면, 갈색 머리의 아가씨일까요?”

“정말 무슨 일이었을까! 궁금해 미치겠어요. 안 그래요, 후작 영애?”

“…그러게요.”

영애들의 말에 성의 없이 동조한 엘레나는 멀어지는 비센테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심코 그에게 잡혔던 손목을 반대편 손으로 감쌌다. 비센테의 손은 걱정스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거의 발작하는 사람처럼 느껴질 만큼.

“…….”

그리고 그는, 끝내 서약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그 뒤로는 모든 것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녀는 죽고, 죽고, 죽었다. 비센테는 돌아가고, 돌아가고, 또다시 돌아갔다. 처음에는 원인조차 몰라 헤매던 것이 무색하게,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죽음을 돌이키는 것은 능숙해졌다.

그럼에도, 겨우 버티는 것조차 잔인한 세월이었다.

그녀에게가 아니라, 비센테에게.

열아홉에서 스물다섯. 그녀의 6년은 그에겐 십수 년의 반복이었다. 그 지난한 세월 동안 그녀가 비센테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단 두 번이었다. 한 번은 처음의 서약식 날, 그리고 두 번째는… 그가 기억하지 못할 오스티나토의 호숫가.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됐어. 괜찮아.”

“하지만 비센테…. 네가 이렇게 다쳤, 다쳤는데….”

엘레나는 제 몸에 들어앉은 채로 예정된 연극을 지켜보듯 극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려다가, 제 손이 피투성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되었다.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고. 네 시녀가 널 찾으러 올 때까지 같이 기다려 줄게.”

“…….”

저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그녀가 멀쩡하게 앉아 우는 것조차 마음 아프다는 듯.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를 무너뜨린 것은 상처나 출혈이 아니었다. 암살자의 칼날에 발린 독이었다. 비센테는 아주 천천히 무너졌다. 엘레나는 의식을 잃은 그의 몸을 겨우 받아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마구잡이로 그를 끌어안았다.

죽으면 안 된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가서는 안 된다고, 빳빳하게 굳은 입술은 제가 뱉어 내는 말이 무언지도 모르고 뱉어 냈다. 순간순간이 절망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그다음에 벌어질 일을 알고 있었다. 그건 아주 기묘한 감각이었다. 제 머릿속에 안전하게 똬리를 틀고, 전능한 신이라도 된 것처럼 지켜보는 것은….

‘이게 다 꿈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겠지.’

곧 엘레나는 예정된 수순처럼 깨달았을 것이다. 비센테에게서 최초로 비밀에 대해 들었던 그 순간을, 시간이 돌이켜지며 영원히 사라졌어야 할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제 목숨을 담보로 또 한 번의 차악을 선택할 것이다. 비센테가 의식을 잃으며 놓친 검을 제 손으로 주워 들 것이다.

“…….”

‘그녀’는 그 모든 기억들이 엘레나를 관통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스스로의 목을 겨누며 선득한 칼날이 들이닥쳤다. 두려움조차 없이.

***

새벽.

엘레나는 겨우 밭은 숨을 몰아쉬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번에도 꿈인가? 아니, 이곳은 과거 ‘엘레나’의 꿈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비센테의 안식처였으니까.

“…….”

엘레나는 현실감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천천히 주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커튼이 조금 열려 있었고, 그 틈으로 오후의 햇살이 방 안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빛을 받은 모든 사물들에 느긋한 그림자가 졌다. 버릇처럼 비센테를 찾았으나,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나. 깨어 계셨네요.”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하녀복을 입은 여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녀는 엘레나가 눈을 뜬 것을 보고는 제가 더 놀란 얼굴을 했다.

엘레나는 여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는 것 좀 도와주세요.”

푹 잠긴 목소리는 거칠게 들렸다. 온몸에 힘이라곤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가 겨우 양팔에 체중을 실은 채 몸을 일으키자, 하녀가 서둘러 다가와 그녀가 침대에 앉는 것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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