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51)

“그게, 무슨….”

엘레나는 뻣뻣하게 굳은 채로 눈만 깜박였다. 오늘을 여섯 번째 살고 있다니…. 쉽사리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완전히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취급할 수도 없었다.

황태자비가 될 운명으로 태어나, 자라면서 사람 보는 눈만큼은 최상급으로 길러 왔다. 비센테에게서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특징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초조함이나 성급함, 시선을 회피하는 비겁함 같은.

그가 겨우 입매를 매끄럽게 올려 보이며 말을 이었다.

“믿기 어려울 거라고, 했잖아.”

“…….”

그녀는 비센테에 대해서 잘 모르긴 했지만, 그의 반듯한 외모만큼이나 강직한 성품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녀의 판단이며 세간의 평가가 다 틀려도, 적어도 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농담이나 할 만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처음엔 지독하게 생생한 꿈을 꿨다고 생각했지. 내가 여섯 살 때 그랬던 것처럼…. 다섯 번째까지는 이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미친 듯이 찾아다녔고. 겨우 찾아낸 공통점은, 무슨 신의 장난 같더라.”

“…….”

“엘레나. 네가 죽으면 내 시간이 돌아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말도 안 돼….”

“믿기 어렵다는 거 알아. 말하는 나도 여전히… 믿기 힘드니까. 하지만 모두 네 죽음 직후였어.”

“…….”

“그래서 이제는 감히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겠군. 오로지 그대의 죽음이야. 엘레나. 내 시간이 돌아가는 조건은.”

그는 힘겨운 듯 잠시 말을 멈췄다. 신음을 억누르는 소리가 축축한 창고 안을 먹먹하게 울렸다. 밭은 숨을 내쉬는 그는 안쓰럽고 애처로워 보였다.

물론, 그녀의 정신은 거기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대체 내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면 고맙겠어.”

납득할 수 있게? 설명?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납득과 설명이 필요한 건 도리어 그녀였다.

황궁에서, 그것도 기사들이 득실거리는 서약식 도중에 납치당한 것도 이상하기 짝이 없는데, 그녀의 죽음이 시간을 돌이키는 열쇠라니.

차라리 농담이라면 기껍겠지만, 비센테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제가 내뱉은 말들이 모두 진실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읽혔다.

‘둘 중 하나지. 그가 미쳤거나, 아니면 정말 진실이거나.’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판단을 내릴 정신도 없었다.

“나는 미안하게도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어. 게다가 내가 왜 너를 두고… 그런 짓을 해.”

“…….”

“비센테?”

그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 상태로 오래 대답이 없자, 그녀는 덜컥 겁부터 집어먹었다. 양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몸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붙이려 노력했다. 발목이 모두 짓무르도록 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정신, 정신 차려봐. 비센테…. 설마, 아니지?”

“멋대로… 죽이지 마, 아직은.”

그의 몸에서 생명이 줄줄 흘러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 와중에도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듯 흐리게 미소 지었다. 기침인지 웃음인지 모를 것을 겨우 뱉어낸 그가, 보랏빛으로 변한 입술을 열었다.

“널 찾았을 땐, 너무 늦어서…. 겨우 믿을 만한 기사에게, 전달이나 했어…. 새벽까지만, 버티면… 넌 구조될 거야.”

“정신 차려…. 제발, 비센테….”

“차라리 잘됐지. 두 번 다시, 이런 성가신 일은 사양이니까….”

“…….”

“그러니 제발, 앞으로는 얌전히 살아. 어디서 혼자 죽지 말고. 오늘은, 다행히… 내가 널 지켰지만.”

혼자 죽지 말라고. 그건 쓸데없이 귀찮게 하지 말라는 투에 더 가까웠다. 그는 사실 지금 이 순간조차 아주 성가시다는 듯 굴고 있었다. 여기서 죽어 가는 게 그 스스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도 되는 양.

그가 이내 그녀를 향해 똑바로 시선을 마주쳤다. 놀란 듯 크게 트였던 청보라색 눈동자에 이윽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스쳤다.

“울지, 마. 엘레나.”

그녀는 제가 우는 줄도 모르고 울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시선에서 얼굴을 감추고 싶었다. 그녀는 제가 울 때 얼마나 못생겨지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굵직한 눈물이나 뚝뚝 흘리는 얼굴을, 그의 마지막 기억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도무지 냉정해질 수가 없었다.

그가 죽는다고…. 그리고 그녀는, 새벽까지만 버티면 살아남는다고. 헛웃음이 바람 빠지듯 입술 사이로 샜다.

그런 허무한 말이 어디 있어. 네가 왜 날 살리고 죽어. 나는 죽으면 네 시간이나 돌이키는데, 널 아주 성가시고 귀찮게나 하는데. 너와 약속한 것은 죄다 내버리고, 최소한의 신의조차 지키지 못한 계집인데.

너는 이 와중에도 왜 날 살려서 다행이라는 듯 웃어. 네가 이렇게 무엇도 아닌 것처럼 허무하게 죽어 가는데….

“아….”

가까스로, 그녀는 가까스로 하나의 생각에 도달했다. 최악의 경우에도 차악을 생각하는 오래된 버릇이 겨우 정신을 붙잡게 했다.

그녀는 제 드레스의 소맷자락을 뜯어 숨겨 두었던 바늘을 꺼냈다. 카스트로에게 몸을 강제당할 뻔한 이후로 그녀는 늘 독이 발린 바늘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거꾸로 잡은 채 제 목을 향해 치켜든 뾰족한 쇠붙이가 횃불을 받아 반들거렸다.

“무슨, 짓이야.”

그건 숫제 으르렁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시야가 가물거리는 와중에도 용케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애써 웃었다.

“내가 죽으면, 네 시간이… 다시 돌아간다고.”

그가 서늘하게 욕설을 짓씹는 소리가 반쯤 미쳐 버린 정신에도 닿았다. 그의 목소리가 더없이 또렷하게 들렸다. 우아한 얼굴에 새파란 경악이 어려 있었다.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든, 그만둬. 엘레나. 제발.”

그녀는 눈을 꽉 감았다. 어차피 여기서 죽든, 살든 그녀는 지옥 속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죽을 용기가 없어서 여태 살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최소한 그라도 살리고 죽는다는 위안이나마 있는 것이 나았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너를 믿어. 비센테. 네가, 너와 나를… 구해 줄 것을, 믿어.”

기묘하게도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무섭지도 않았다. 그녀는 손을 움직였다. 깊게 찌를 필요조차 없었다.

***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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