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서 있는 것을 누가 본다고 해도 의심조차 받지 않을 만큼.
사내 중 한 명이 비센테의 상처를 보더니 대뜸 욕설부터 지껄였다.
“아, 잘 좀 쏘지. 이 새끼 바로 죽지도 않겠네.”
“이제 어떻게 해? 여자는 이대로 끌고 간다 치고. 이놈은?”
“시간을 더 끌면 총소리 때문에 몰려올 거야. 제기랄, 브루노가 죽었어.”
“이 개새끼도 죽여 버리자.”
“진정해. 일단 데려가서 인적 드문 곳에 묻자고. 어느 쪽이든 시체를 남겨서 좋을 건 없으니까.”
“젠장, 그러게 혼자 남을 때까지 기다리자니까.”
“됐어. 신호 보니 지금 북문 비워졌단다. 빨리 움직여.”
그 대화를 끝으로 그녀의 몸이 덜렁 들리더니 누군지도 모를 사내의 어깨에 짐짝처럼 얹어졌다.
치미는 공포심에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다. 황궁이었다. 어떻게든 저항하면, 누군가 그들을 발견하고….
버둥거리는 그녀의 뒤통수를 웬 손이 찍듯이 눌렀다. 고개가 처박히자마자 목뒤를 후려치는 끔찍한 통증이 닥쳤다.
그리고, 암전이었다.
***
그녀가 다시 깨어난 것은 어둑한 방 안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정확히는 머리가 아니라, 뒤통수부터 목덜미까지 찌르르 울렸다. 손으로 쓸어 보니 적잖게 큰 멍이 들 모양이었다.
엘레나는 겨우 팔로 몸을 받치고 일어났다. 방은 아주 눅눅하고, 지저분했다. 썩은 곡식 자루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아무렇게나 쌓인 상자들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서 대체 여기는 어디인지. 그녀는 청회색 눈동자를 느릿하게 깜박이며 주변을 살폈다.
‘정신을 얼마나 잃고 있었던 거지?’
기절한 시간이 짧다면 아직 수도 인근일 터였다. 귀를 기울이니 사내들이 와락와락 웃어 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마도, 그녀가 갇힌 장소는 어느 건물의 지하실 같았다.
습기로 눅눅했고 창문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벽에 걸린 다 꺼져가는 횃불이 유일하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하께서는 어떻게 되셨지?’
그녀는 서둘러 움직이려다가 다시금 바닥에 무릎부터 처박았다. 발이 기둥에 밧줄로 묶여 있었다. 겨우 꼼지락댈 수 있는 보폭 정도만 남겨 놓고….
그녀는 자유로운 손으로 제 발의 매듭을 풀려고 낑낑댔다.
“소용없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엘레나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반대편 기둥에 비센테가 묶여 있었다. 양 손목을 등 뒤로 붙잡아 밧줄로 단단히 얽어 놓은 채였다.
그는 묘하게 침착해 보였다.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러니까, 어떻게.’
그가 고통스러운 듯 기둥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젖혔다. 땀에 젖은 피부가 횃불의 불빛을 반사해 희부옇게 빛났다.
비센테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서약식은 평민들도 참여하는 축제니까 거리가 소란스러운 데다가 치안도 좋지 못해. 죽었다 깨어나도 경비대가 들을 일은 없으니 소리 지르는 짓은 제발 하지 마.”
말이 다시 짧아진 것은 차지하고서라도, 그의 충고는 엘레나가 잠깐은 고려했던 내용이었다. 그녀의 속을 정확하게 읽은 것 같은 말에 엘레나는 입술을 조금 벌렸다.
그녀는 몇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가 이내 지웠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전하께서는 어떻게 아셨어요?”
“이 와중에도 계속 존대할 건가?”
“…….”
“내가 네게 무례하게 굴면, 너도 무례하게 굴어. 그게 너다우니까, 엘레나.”
그녀는 잠깐 침묵했다. 가늘게 뜬 눈매를 이내 단호하게 치떴다.
“좋아, 비센테.”
제가 뱉어 놓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던 엘레나는, 이내 다시금 독하게 내뱉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내가 못 할 것도 없지. 대답해 봐. 대체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믿기 어려울 텐데.”
“믿고 안 믿고는 내가 정해.”
그가 픽 웃음을 물었다. 그나마 익숙한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서인지, 머리가 차츰 냉정을 되찾았다.
비센테의 얼굴에는 핏기라곤 한 줌도 없었다. 이마와 뺨에는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제야 이벨린은 그의 어깨가 총에 관통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저 상태로 묶어 두었다면 제대로 된 지혈도 없었으리라.
황망하게 내리뜬 시야에 바닥에 흥건히 고인 핏물이 보였다. 그의 팔뚝에서 똑, 똑 떨어지고 있는 핏방울도.
“맙소사…. 전하, 출혈이….”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창백한 목덜미엔 새파란 핏줄이 그대로 도드라졌다. 출혈량이 슬슬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그제야 엘레나는 그의 상태가 제 짐작보다도 훨씬 심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명백하게 죽어 가고 있었다.
“너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생각보다, 멀쩡해.”
“그 꼴로 멀쩡하다고!”
“너보다 먼저 죽은 게 처음이라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는데.”
“말하기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돼. 하지 마, 제발. 조금이라도 힘을 아껴. 사람들이, 분명히 올 테니까….”
그의 말은 이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엘레나는 애걸하듯 읊조렸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끔찍했다.
“사람들은 오지 않아.”
“어떻게 알아. 네가 어떻게….”
“나는 오늘을, 여섯 번째 살고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