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51)
  • “…결례가 안 된다면, 이름을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이름. 그녀는 대답조차 못 한 채 얕게 숨을 몰아쉬었다.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갈비뼈가 팽팽히 부풀었다가 수축하며 살갗을 아프게 찔렀다.

    감히 무슨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네가 힘들 때 가장 먼저 배신한 카스타야 후작의 딸이라고? 그 뒤로 널 찾지도 못한 매정하고 신의조차 없는 계집이라고?

    그의 시선에 떠밀린 그녀가 열없이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저기 좀 봐. 황태자비 전하셔.”

    “벌써 그 호칭은 이르지. 아직 약혼자의 신분이잖아.”

    “곧이잖아. 내년에 성년이 되자마자 황궁으로 들어오신다던데. 그런데… 옆에는 누구지? 남자랑 같이 계시는 것 같은데. 후작 각하신가?”

    “남자? 여기선 잘 안 보이는데.”

    그들의 머리 위에 열려 있던 창문 중 하나에서 속살거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그 순간, 엘레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예법마저 잊고 치맛자락을 와락 구겼다.

    “…아.”

    치솟은 공포에 눈앞의 비센테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 소문이 카스트로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이번에는 대체 어떤 끔찍한 짓을 벌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채로 겨우 숨만 몰아쉬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비센테였다.

    “용서하십시오.”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당겨 쥐었다. 그대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쥔 채 후원의 안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엘레나는 얼떨떨하게 달려가듯 움직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 후원의 안쪽부터는 황족이나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었다.

    비센테가 돌아왔다는 것을 현시점에서 아는 사람은 드물 터였고, 시야상 저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남자가 금발을 지녔다는 것 정도일 터였다.

    뻣뻣하던 숨통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했다. 지금의 행동으로 저들은 비센테를 카스트로로 착각할 것이다.

    “…….”

    이윽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그가 걸음을 멈췄다.

    “의사를 여쭙지도 않고 행동한 한 점 사죄드립니다. 머뭇거렸다간 불필요한 오해를 살 듯하여.”

    “…아니,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차마, 비센테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눈에 어린 비난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오늘만 아니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여느 연회장에서 만났다면, 그녀가 다시 단단히 무장한 상태였다면, 카스트로의 폭거에 마음이 짓밟힌 상태가 아니었다면….

    시종일관 태연한 눈으로 인사하고 담담한 척 굴었을 터였다. 여태껏 버텨 왔던 대로.

    “엘레나 데 카스타야.”

    비센테가 그녀의 이름을 입 밖으로 뱉었지만, 그건 부르기 위해서라기보단 탄식에 가까웠다.

    “그대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엘레나가 당혹해하는 동안,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 올렸다.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한 태도로.

    손끝에, 그의 숨결이 잠깐 닿았다.

    “실례했군요.”

    그녀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짐작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알면서도 도와줬다고?

    …대체 왜?

    ***

    “백작 부인께서 정말 그랬다니까. 아, 저기 좀 봐. 저 잘생긴 장교는 어때?”

    “글쎄. 춤 한두 번 추는 것 정도야 괜찮겠지만….”

    “나는 입맞춤까지도 괜찮을 것 같아.”

    “정말 정신 나간 소리를 다 해. 네 약혼자가 알면 까무러칠 것을!”

    숨죽인 웃음소리가 그녀와 가까운 좌석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엘레나의 양옆으로 나란히 앉은 영애들은 모조리 사교계 데뷔조차 안 한 어린 연치였다.

    결국 저들이 얼마나 하룻밤 일탈에 대해 꿈꾸어 대든, 서약식이 끝나면 곧장 유모의 손에 붙잡혀 가문으로 얌전히 끌려 들어갈 가련한 양들이었다.

    “비전하께서는 어떠세요?”

    순식간에 불똥이 그녀에게 튀었다. 당혹스럽게 눈을 깜박이자, 곁에 있던 라우라가 그 영애의 허리를 쿡 찔렀다.

    “비전하라니. 벌써부터.”

    그러나 눈치도 없이 덧붙이는 말이.

    “그래도 어떻게 함부로 이름을 부르니? 내년이면 황태자 전하와 성혼할 애를 두고.”

    “호칭도 호칭이지만, 황태자 전하를 두고 다른 사람이 눈에나 들어오겠어?”

    “모를 일이지.”

    그 목소리엔 희미한 악의마저 느껴졌다. 엘레나는 그저 웃었다.

    “아직은 이름으로 불러 줘. 그게 더 편하기도 하고. 벌써부터 거리 두는 것처럼 느껴져서 서운해.”

    “나야 아무래도 좋을 일이지만…. 그래서 어때?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라도 있어?”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누가 괜찮아 보인다는 사소한 말 한마디만 흘려도, 저녁이면 그녀가 바람피울 상대를 물색한단 소리로 변질될 터였다. 와전되지 않는다고 해도 카스트로의 귀에는 그게 그거인 양 들릴 터였다.

    엘레나는 숨을 천천히 내쉬며 곤두선 신경을 다스렸다.

    “아가씨.”

    일렬로 놓인 비좁은 좌석을 겨우 비집고 들어온 남자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최근 그녀의 아버지가 곁에 두고 부리는 하인이었다. 그가 품속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후작 각하께서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녀는 황제의 곁에 붙어 웃고 있는 카스타야 후작을 한 번 바라보곤, 쪽지를 펼쳤다.

    지금 즉시 마차로 돌아가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