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51)
  • “전하.”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시종장이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황후 폐하께서 급히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지금?”

    “엘 메데프의 일에 관해 아신 것 같습니다.”

    엘 메데프의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카스트로의 표정이 변하는 것으로 봐서는 심각한 문제인 듯했다. 엘레나는 조금 더 공손히 물러섰다.

    “가 보셔요, 전하.”

    “…혼자 돌아갈 수 있겠어?”

    “아버지께서 오늘 폐하를 뵈러 궁에 드신 것으로 알아요.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아버지와 함께 돌아갈게요.”

    “그래?”

    그제야 카스트로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시종장을 한 번 초조하게 바라본 그가, 그녀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럼, 다음에 봐. 엘레나.”

    “예, 전하.”

    그녀는 카스트로의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의 인내는 딱 거기까지였다.

    엘레나는 다급한 손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자작 부인에게 무슨 인사를 건넸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황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점점 빨라지던 발걸음은, 어느 순간부터는 뜀박질에 더 가까워져 있었다. 긴 복도를 지나서, 계단을 반쯤 미끄러지듯 내려가, 황궁의 절반을 달렸다. 어디든 답답하게 차오른 숨을 마음껏 뱉을 곳이 필요했다.

    “후, 으….”

    정신없이 발길 닿는 대로 온 것인데… 별궁 근처의 후원이었다. 장미 정원과는 거리가 다소 떨어져 있지만, 이곳에도 장미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녀는 폐부 깊숙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턱에서 똑, 땀방울이 떨어졌다.

    ‘진정해, 제발….’

    황제가 제 장자에게 황위를 계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 벌써 3년이 꼬박 넘었다.

    사람들은 여덟 살짜리인 3황자 대신, 2황자를 유력한 계승권자로 꼽았으나 그는 수도에 기반을 만들기는커녕 바깥으로만 돌았다. 황제가 나서기도 전에 바짝 엎드리는 모양새로.

    ‘비탈리 가문 때문에 카스트로 전하께 일단 황태자 위를 계승시키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폐하께선 3황자가 자라길 기다리시는 거겠지.’

    폐하와 밀담을 나눈 직후부터 카스타야 후작이 그녀의 결혼에 다소 미적지근해진 것도 그 영향이 없지는 않을 터였다.

    ‘죽어도 썩은 줄을 잡으실 분은 아니니까.’

    3황자와는 나이가 맞지 않으니, 고분고분한 사촌들 중 하나를 황태자비로 골라잡을 것이고, 아마도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나 팔려갈 테지만….

    이제는 카스트로만 아니면 족할 지경이었다. 그날, 이후로 정말이지…. 그녀가 휘청이며 주저앉으려던 찰나였다.

    “영애.”

    그녀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역광을 등진 사내가 보였다.

    “이것을 떨어뜨리셔서.”

    이것. 그가 내민 것을 반사적으로 받아 들고 보니 부채였다.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정신없이 뛰어오다가 그만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엘레나는 부채를 쥔 채로 천천히 숨을 골랐다.

    “…….”

    빛을 등진 사내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가늠할 수 있는 것은 키가 크고 체격이 훤칠하다는 것 그리고 그녀에게 부채를 건네던 태도가 제법 정중하다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대꾸조차 없이 서 있자 남자가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섰다.

    “혹, 몸이 불편하십니까?”

    성실하기도 하지. 엘레나는 이죽거림을 간신히 삼켰다. 태연한 척 굴고 있었지만, 사내의 그림자가 저를 덮는 이 상황 자체가 못내 불편했다. 엘레나는 불안으로 떨리는 입술을 짓씹듯 깨물었다.

    어쩌자고 하녀조차 떼어 둔 채로 여기까지 왔을까.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까지 오면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엇을 어쩌자고.

    “영애.”

    남자가 여태 보이는 정중함이 순수한 호의일지도 모르겠지만, 요즘의 그녀는 도무지 호의를 호의로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한때는 한 겹이나마 정중했던 카스트로조차 순식간에 돌변했고, 그녀의 주변은 그녀를 인간이 아닌 물건처럼 취급해 댔다.

    호시탐탐 ‘카스타야’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기회만 노리는 인간들도 도처에….

    “영애?”

    “…아.”

    그녀는 그제야 제가 아주 이상하게 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마자 뺨이 확 달아올랐다.

    “시, 실례했어요. 제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서.”

    제 속이 얼마나 끔찍하게 뒤틀렸든, 남자는 그저 호의를 베푼 것뿐이었다. 가늘게 좁혀 뜬 눈에 남자가 입고 있던 제복이 보였다. 사관생도의 복장이었다.

    만약 그녀가 제정신이었다면 조금 더 빨리 알아차렸을 터였다. 아마도 갓 기사가 된 입장에서 숙녀의 곤경을 도와주려던 것이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들끓던 마음이 조금쯤 여유를 되찾았다. 그녀는 이제 거의 미소까지 지을 수 있었다.

    “부채를 찾아 주셔서 감사해요. 내일 있을 서약식에 참석하러 오신 분이실까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길을 아예 잘못 드셨어요.”

    그녀는 사내의 견장 즈음에 시선을 고정한 채 덧붙였다.

    “서약식이 열릴 대 연무장은 이쪽에 있지 않아요. 중앙을 가로질러서, 첨탑이 보이는 건물까지 가셔야 해요. 이 앞쪽으로는 황족들이 드나들 수 있는 장소 말고는 없어서….”

    “길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구구절절하게 길어지던 그녀의 말을 남자가 부드럽게 잘랐다. 엘레나는 당혹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남자와 시선이 정확히 마주친 순간, 그녀는 또 다른 자기혐오를 마주했다. ‘그’였다.

    “…….”

    비센테 오스티나토 시모라 데 에스페다. 한때는, 그녀의 약혼자였던…. 어린 시절에는 제법 가깝게 지냈으나, 이제는 얼굴을 보기는커녕 편지조차 주고받지 못한 세월이 길었다. 그럼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금발, 청보라색 눈동자, 단정한 이마, 곧은 콧대, 보기 좋은 뺨과 입술. 그들이 만나지 못한 세월은 그를 근사한 청년으로 피워 놓았다. 순간은, 주제도 잊고 잠시 넋을 놓았을 정도로.

    “괜찮으신 것을 확인했으니 되었습니다.”

    “…….”

    “숨을 쉬지 못하시는 것처럼 보여서요.”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알아보았다면, 그를 배신한 카스타야의 딸을 걱정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는 단정하게 예를 갖췄다.

    그리고는 몇 걸음 물러나다 멈춰 서서 그녀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의구심으로 조금 가늘어진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직시했다. 눈, 뺨, 입술, 콧등…. 스치는 시선마다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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