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라우라의 말은 대부분이 그녀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이 혼사를 더없이 귀한 것으로 받들고, 그녀의 지아비가 될 자를 모든 귀족들 중 앞세워 치켜세워 주고….
어차피 받아들이게 될 운명이라면 마음이라도 조금 편하라고. 이제 해가 바뀌어 성년이 되면, 그녀는 ‘황태자비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결혼식 때까지 황궁에서 지내기로 되어 있었다.
그전까지야 미친 짓 몇 번으로 깰 수도 있는 혼사였겠으나, 황궁에 들어간 이후부터는 그 의미부터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 너에 대한 애정이 지나치시긴 하지만 여태 나쁜 짓은 한 번도 하지 않았고.”
“…….”
“꼼꼼한 성미시니 사생아를 만드실 분도 아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들을 제 침대로 끌어들이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게 죄는 아니었다. 황태자가 문란한 것은 흠결이 아닌 지배욕이나 정복욕 따위의, 마치 군주의 자질처럼 인정받는 시대였다.
그녀가 가장 답답하게 생각하는 카스트로의 집착도 라우라의 말처럼 애정이 지나친 것으로 생각하면 아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엘레나는 치받는 속을 가까스로 삼켰다.
“전하께서 다가오시는 것을 너무 거부하지는 마. 엘레나, 너를 위해서라도.”
라우라의 조언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각자의 가문에서 그들의 위치는 비슷했다. 숙부의 손에 위탁되어 어디로든 팔려 갈 날만 기다리는 라우라나, ‘카스타야’라는 이름을 멍에처럼 두른 채 이리저리 주인이 바뀌는 그녀의 신세나.
후계나 낳고, 그 신분이나 유지하면 그만인 삶.
“사내들이란 제 마음이 거절당했다고 생각하면 아주 사납게 돌변하기도 하니까. 부디 마음을 편히 먹고….”
결국 네가 정을 붙여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래야 네가 편하다고, 우리에게 사랑으로 하는 결혼이 가당키나 하냐고.
그래. 물론, 전부 옳은 소리였다. 옳아서 체념하던 부분이었고, 알아서 아비의 명령대로 2황자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황태자에게 갈아탔다.
온 세상이 손가락질을 해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알겠어, 라우라.”
엘레나는 길어지는 생각을 적당한 미소로 잘라 냈다.
“어디서 무슨 이야길 듣고 와서 내게 이러는지 알 것 같긴 한데, 어쨌든 전하를 좀 더 믿어 볼게. 안 그래도 오늘 황궁에 갈 일이 있긴 했어.”
“황궁에?”
“내가 지낼 방을 직접 골라 보라고 하셔서.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가자. 가는 길에 너희 집 앞에서 내려 줄게.”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레스의 주름을 다시 잡느라 분주히 치마를 툭툭 터는데, 문득 라우라가 그녀를 불렀다.
“엘레나.”
“응?”
애써 그녀를 불러 놓고도 라우라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혹시, 그분께서… 소문처럼 널 강제하려고 든 건 아니지?”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듯 떨리는 음성이었다.
엘레나는 라우라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는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세상에서 그보다 더 우스운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는 것처럼 활짝 웃었다.
“아니야. 그런 거.”
***
“…하니까요. 그래서 동쪽 창에 커튼은 마주앙에서 수입한 레이스로 장식하고, 카펫은 도레아 산 최고급 직물을, 티 테이블은 아가씨께서 사저에서 쓰시던 것처럼 물푸레나무로 된 것을 두려고 해요. 그리고 여기, 이쪽을 보시면….”
방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레날 자작 부인의 모습에 엘레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사실 하나뿐이었다.
“전부 마음에 들어요. 그대로 진행해 주세요.”
“마음에 드신다니 기쁩니다. 성년 데뷔를 치르시자마자 바로 들어오실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겠습니다.”
엘레나의 치하에 레날 자작 부인이 가슴에 손을 올리며 크게 절을 했다. 한낱 후작 영애가 받기엔 과분한 예의였다. 엘레나가 당혹스럽게 손을 저으려는 찰나에, 등 뒤에서 다가온 카스트로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들어와 살았으면 좋겠다 싶은데.”
“전하….”
그녀의 몸을 아무렇게나 당겨 안은 그가, 엘레나의 뺨에 제 입술을 화인처럼 꾹 내리눌렀다.
“네 성년까지 대체 어떻게 기다리나 싶어. 당장 결혼하고 싶어 죽겠어.”
애써 꼼꼼히 올린 머리를 풀어 내리는 손길은 거칠었다. 핀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허리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느껴지는 깨끗한 향기에 카스트로가 잘게 신음했다.
“내가 널 얼마나 참고 있는지 너는 모를 거야.”
모를 리가. 고작해야 2주 전의 일이었다. 카스트로 후작이 자리를 비운 때에 저택으로 쳐들어온 그가 응접실에서 그녀를 찍어 누르던 것이.
가까스로 그를 설득해 일이 벌어지는 것은 막았지만, 그때의 기억이 치솟으면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겨우 스스로를 다스려야 했다.
어차피 남편이 될 사람이니까, 이 사람이 아니라도 다른 사람에게 팔려 갈 테니까, 라우라의 말대로 준수하고 나이도 비슷하니까….
어쩌면,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해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아, 순결한 내 엘레나.”
귓가를 핥을 듯 가까워진 입술이 속삭였다. 그의 지분거림에 자작 부인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지고하신 황태자 부부의 애정을 차마, 신하 된 처지에 망령되게 눈에 담을 수 없다는 듯.
‘순결하다고.’
순간 침이라도 뱉고 싶도록 혐오스러웠지만, 카스트로와의 관계에서 그녀가 가진 무기는 그게 전부였다.
이러다 아이라도 가지면 전하께서는 괜찮을지 몰라도 저는 괜찮지가 않다고. 반드시 첫 관계는 결혼식을 올린 후에 가져야 한다고. 우리의 아이는 어떤 구설수도 없이 태어나야만 한다고.
그러니 부디, 혼전 순결 서약을 지켜 달라고.
‘대체 그가 어떤 말에 멈췄는지는 모르겠지만.’
울며 헐떡이던 며칠 전의 기억이 떠오르자 심장이 콱 죄어들었다. 그에게 닿아 있던 몸을 조심스럽게 떨어뜨렸다. 일순, 카스트로의 시선이 사나워졌다.
“약속은, 약속, 하셨으니까….”
“그렇지. 그래서 아무 짓도 안 하잖아. 이 꼴을 하고도.”
그녀는 아래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지막 희망처럼 절박하게 제 소맷자락을 붙잡은 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