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51)
  • 그녀는 막막한 숨을 뱉었다. 돌아간다고, 그리고 그 조건은 죽음이라고. 결국 맥락을 파악하자면 그런 뜻이었다.

    비센테가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는. 엘레나는 입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건 그녀가 가진 기억도 아니었다.

    ‘말도 안 되지. 하나부터 열까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정신 상태나 의심받기 딱 좋은 소리고.’

    하기야, 그녀의 존재부터 말이 되기나 할까. 죽었다 깨어나 보니 다른 사람의 육신을 뒤집어쓴 상태였는데….

    “…….”

    만약 그녀가 봤던 환각이 실제로 언젠가의 시간 선에서 일어났었던 일이라면? 시간이 달라지며 ‘그녀’는 잊었지만, 영혼에는 각인되어 있다가 이제야 떠올리게 된 것이라면?

    그러니까 정말로, 비센테가 그녀를 살리기 위해 수십 번, 수백 번의 시간을 반복하며 견뎌 왔다면….

    잠깐 생각해 본 것만으로도 숨이 벅차올랐다.

    ‘그것만은 안 돼.’

    그때는 도저히 비센테의 얼굴을 바라볼 수조차 없을 터다. 그가 저 때문에 어떤 세월을, 어떻게 버텨 왔는지를 알아 버린다면….

    “네가 그 여자를 찾았던 것은 알고 있어.”

    문득 들려온 비센테의 목소리에 엘레나는 겨우 시선을 들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그녀는 조금쯤 안심했다. 그래, 비센테였다.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시간을 되돌리는 대단한 마법사나 악마 따위가 아니라.

    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도 안 되는 망상이거나….

    그녀는 그제야 겨우 멀쩡한 목소리를 냈다.

    “그 여자?”

    “네 유모. 이미 사람들을 시켜 행방을 파악했고, 이쪽으로 데려오고 있어.”

    “…….”

    “말했잖아. 이 기적을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하겠다고.”

    그의 얼굴에 전에 없는 희망이 스몄다. 힐다를 찾기만 하면, 이 상황에 대해 최소한 실마리라도 얻게 되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는 듯했다.

    알고 있어 더 서글픈 것들이 있다. 어쩌면 그녀의 끝은 예상보다도 더 빠르게 닥칠지도 몰랐다.

    그녀는 저도 비센테의 희망이 기껍다는 듯 웃었다. 망연하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제발 그런 표정 짓지 마.”

    “…….”

    “정말 다 잘될 테니까. 우리는….”

    우리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

    다시 꿈을 꾸었다.

    아주 어둑한 공간이었고, 그녀의 발아래에 수만 가지로 갈라진 시간 선이 보였다. 그녀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니까, 시작점에.

    문득 정면을 바라보니 희미한 빛이 보였다. 그쪽으로 가야만 할 것 같은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가 깨어나자 빛은 사라지고 웬 응접실이 나타났다.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곳곳에 놓인 아주 익숙한 방이었다. 엘레나는 어렵지 않게 이날을 떠올렸다. 열아홉, 여름, 카스타야의 저택.

    중앙의 긴 카우치엔 그녀를 꼭 빼닮은 인형이 앉아 있었다. 운명의 실타래가 거미줄처럼 인형의 손발을 옥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엘레나.”

    마치 물 밖에서 물속에 있는 사람을 부르는 것처럼 소리가 멀었다. 웅웅 울리기나 하던 목소리에 한 번 더 힘이 실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확실하게.

    “엘레나.”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응접실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조금 전 ‘인형’이 앉아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제 팔꿈치를 툭 건드리는 손길에 엘레나는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예민한 반응에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는 도리어 제가 더 놀란 눈을 했다.

    “왜 그래?”

    여자를 바라보던 엘레나의 눈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그리운 얼굴이었다. 라우라. 열아홉에 팔리듯 외국의 귀족에게 시집간 뒤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던….

    잠깐만, 뭐라고? 순간적으로 치솟았던 위화감은 라우라의 웃음에 삽시간에 지워졌다.

    “뭐야. 갑자기 사람을 보고 울기나 하고.”

    엘레나는 손을 들어 제 뺨을 만졌다. 그러게, 정말 눈물이었다. 그녀는 신기한 눈으로 제 젖은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꿈이라도 꿨어?”

    “…그랬나 봐. 아니면 졸았거나.”

    “별일이네. 어쨌든 내 의견은… 네가 조금은 카스트로 전하에 대해 너그러워져도 괜찮다는 거야.”

    “…….”

    “뭐가 됐든 결혼할 사이잖아.”

    엘레나는 입술을 살짝 말아 물었다.

    “…그렇지. 내게 거부권은 없으니까.”

    “큰일 날 소린 하지 말고.”

    라우라는 걱정스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스트로의 대외적 이미지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고, 얼굴의 흉터를 제외하면 준수한 생김새에 나이도 젊었다. 게다가 황태자라는 고귀한 지위까지.

    이 시대 귀족 여성들의 삶이 제 아비가 권하는 혼사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하면, 엘레나의 약혼은 아주 성공적인 것이었다.

    “자주 전하를 뵙고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의외로 잘 맞는 구석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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