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51)
  • “차가웠어?”

    그가 깜짝 놀라며 제 손을 그녀에게서 떼어 냈다. 마치 그녀에게 대단한 위협이라도 가했다는 것처럼. 고작해야 조금 서늘한 손이나 들이민 게 전부면서….

    하긴, 처음에는 그녀를 제대로 잡지조차 못했으니 이만큼 온 것도 대단한 발전이었다. 그는 제가 그녀를 만지거나 스치기만 해도 그녀가 곧 죽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어쩌면 그녀는 오늘, 비센테가 가진 죄책감의 근원을 확인한 것일지도 몰랐다.

    “좀 더 자. 네 상태가 괜찮으니, 내일부터는 하녀를 들여보낼게.”

    엘레나는 그가 제 베개를 직접 정리하는 것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있잖아.”

    “응.”

    “내가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고,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유를 묻지도 말라고 했던 거. 기억해?”

    “응. 다 기억해.”

    ‘이벨린’이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비센테의 완벽한 표정에 금이 갔다. 그는 도저히 버티기 힘들다는 듯, 제 손을 들어 이마부터 뺨까지 사선으로 쥐었다. 미처 가려지지 않은 절반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한 자기혐오가 치미는 듯했다. 도무지 속죄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처럼….

    엘레나는 입술을 깨물고, 얼른 비센테의 반대편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그가 더는 죄책감 속에서 허우적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의 긴 손가락 마디마다 제 손가락을 얽고 따듯한 체온을 불어넣었다.

    “비센테. 나 좀 봐 줘.”

    그녀의 말에 그가 겨우 제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렸다. 무너진 청보라색 눈동자가 가만히 시선을 마주해 왔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을 겨우 견디는 것 같은 눈으로, 남은 자리마다 맹목적이기까지 한 감정을 그득 담아서.

    가끔은, 그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때가 있었다.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그저 그가 너무 안쓰러워서. 누구라도 꿈꿀 만한 외모와 고귀한 혈통, 재물까지 움켜쥐고 태어났으면 생을 즐기기만 해도 족할 터였다.

    그런데 어쩌다 그녀와 얽혀서 여태껏 고통만 받고 있나.

    이제는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제 과거마저 증오하며….

    “…….”

    엘레나는 그를 조금 더 제 쪽으로 당겼다. 힘을 조금 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쉽게도 그녀 쪽으로 무너졌다. 그가 끄트머리에 앉자 침대가 체중대로 기울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이불 속에 집어넣었다.

    “네 손이 아무래도 너무 차가워서…. 사실, 그때 묻고 싶은 게 따로 있었거든.”

    말을 뱉고 나서도 엘레나는 한참 동안 망설였다. 과거를 입에 올린다는 것은, 그의 상처를 헤집겠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다.

    갈팡질팡하는 기색에, 비센테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꼼꼼히 넘겨 주며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 네가 내게 조심해야 할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정말 뭐든지 물어봐도 돼?”

    “그래.”

    “전부 솔직하게 대답하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어?”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돌아왔다.

    “그건 자신 없고.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은 성의껏 할게.”

    “그게 뭐야.”

    엘레나는 그를 마주 보며 흐리게 웃었다. 그와 이렇게 웃을 때면, 말라붙은 심장에 따스한 온기가 도는 듯했다.

    ‘이벨린’의 가면은 완전히 내려놓고…. 그녀를 연기하고 있을 땐, 아주 날이 서 있어서 말 몇 마디를 내뱉기도 전에 쉽게 지치곤 했으니까.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그때, 내가… 독을 마셨을 때 말이야.”

    엘레나는 본능처럼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불안정한 눈빛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내가 정말로 죽은 게 맞을까?”

    “…그게 무슨 소리지?”

    “내 몸이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는지 궁금해서….”

    “무슨 이야기라도 들었어?”

    “그건, 아닌데….”

    “엘레나.”

    그의 큼직한 손이 그녀의 양 뺨을 감싸 들어 올렸다. 어쩌면 강제였겠으나, 하도 부드러워서 그렇게는 느껴지지도 않는 힘이었다. 그녀는 우스꽝스럽게도 뺨이 눌린 채로 엷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만약에… 아무래도 이건 내 몸이 아니니까, 그러면 좋겠다 싶어서….”

    그는 잠깐 침묵했다. 과거를 되짚어 생각해 본다기보다는, 그녀가 이런 것을 물을 거라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낯이었다. 혼란스러워 보였다.

    “네가,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정말 만약에.”

    “네가 숨을 쉬지 않는 건 내가 확인했어. 네가 그 독에 내성이 없다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고. 그리고, 엘레나.”

    그녀의 뺨을 쥔 손이 거짓말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창백하던 얼굴에서 희미하게 남아 있던 혈색마저 사라졌다.

    “넌 그날, 분명 치사량을 마셨어.”

    그는 제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도 못한 채, 그녀의 눈꺼풀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었다. ‘엘레나’가 정말 여기에, ‘이벨린’의 육신 너머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그녀는 막막한 숨을 내뱉었다. 질문들이 연속적으로 머릿속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까 네 서재에서 본 수첩의 내용이 대체 뭔지, 거기 나오는 E는 누구인지, 왜 같은 날을 반복적으로 겪은 것처럼 쓰인 기록이 있는지, 하나의 사건에서 시작된 수많은 결과들을 어떻게 알았는지….

    생각을 정리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엉망으로 꼬이는 기분이었다.

    “네가 죽으면 내 시간이 돌아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말도 안 돼….”

    “믿기 어렵다는 거 알아. 말하는 나도 여전히… 믿기 힘드니까. 하지만 모두 네 죽음 직후였어.”

    “…….”

    “그러니 제발, 앞으로는 얌전히 살아. 어디서 혼자 죽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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