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51)
  • “죽을 운명을 비틀면, 그 뒤론 끔찍한 일만 닥쳐오죠. 운명은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난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주 잔인해져요. 언제부터 시작될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반드시 시작된다는 거예요. 인과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면, 한낱 인간은 깔리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게 고작이죠.”

    아주 안타깝고 안쓰러운 것을 보듯 그녀를 바라보던 힐다의 눈동자. 운명이 응시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불행을 피하기 위한 행동이 더 큰 불행을 불러온다고, 그 어떤 수호 마법이 지키고 있다고 해도….

    어린애 머리맡에서 읊기엔 무거운 말인데도, 힐다는 종종 저도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그런 말을 넋두리처럼 내뱉곤 했다.

    “울지 마, 엘레나.”

    순간,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웅크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비센테의 목소리였다.

    방에서 나온 뒤로 시간이 한참 흘렀을 테니… 그녀가 없어진 걸 알고 찾아온 걸까? 하지만 방 안을 아무리 둘러봐도 비센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엘레나는 초조한 숨을 삼켰다. 무언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고개를 양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앞이 환해지더니 어느 시절의 기억이 펼쳐졌다.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됐어. 괜찮아.”

    “하지만 비센테…. 네가 이렇게 다쳤, 다쳤는데….”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고. 네 시녀가 널 찾으러 올 때까지 같이 기다려 줄게.”

    “…….”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 이 환각은 죽어도 그녀의 기억이 될 수 없었다. 그녀는 비센테가 다치는 걸 본 적이 없었고, 그러므로 이런 대화를 나눈 과거도 없었다. 그런데, 대체 이건 언제지?

    얼굴이 앳된 것을 봐선 스물하나 즈음인 것 같았다. 오스티나토의 호숫가, 근처에 널브러진 시체들, 피투성이가 된 비센테…. 서서히 저물어 가는 그를 붙잡고 오열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먼 관찰자의 시점으로 보였다.

    그러다 문득, 또 한 번 장면이 바뀌었다.

    다시 비센테였다. 열아홉 즈음이거나, 많이 쳐줘도 갓 성년이 되었을 즈음…. 입고 있는 옷도 장소도 바뀌었다. 눅눅한 창고 안, 나직하게 울리는 음성.

    “네가 죽으면 내 시간이 돌아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말도 안 돼….”

    “믿기 어렵다는 거 알아. 말하는 나도 여전히… 믿기 힘드니까. 하지만 모두 네 죽음 직후였어.”

    “…….”

    “그러니 제발, 앞으로는 얌전히 살아. 어디서 혼자 죽지 말고.”

    충격으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게 완전히 꿈이라고? 이렇게 생생한 광경은, 아니, 그보다 그가 하는 말이 대체….

    “엘레나.”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숨을 들이쉬었다. 오랫동안 물속에 잠수했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귀가 먹먹했다. 처음에는 머리가 멍했고, 다음 순간 현실이 쏟아지듯 인식되었다.

    엘레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책상을 짚고 선 비센테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또 다른 환각이 아니라, 진짜였다. 가깝게 붙어 선 자의 체온이 공기를 데웠다.

    그가 그녀의 손에서 부드럽게 수첩을 가져가 책상 위로 돌려놓았다.

    “네가 없어진 줄 알고 놀랐어.”

    책망은 부드러웠다. 그가 무너지는 얼굴로 웃었다.

    “여기 있을 줄은 몰랐네.”

    그제야 엘레나는 비센테의 차림이 평소와는 달리 완전히 흐트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지어 구두조차 신지 않은 채였다.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꼼꼼히 넘겨줄 정신은 있으면서, 정작 제 얼굴에 한 점의 여유도 없다는 건 미처 숨기지도 못하고.

    “목이 말라서, 물을 좀 마시려다가….”

    “깨우지.”

    “겨우 잠든 것을 아는데 어떻게 그래.”

    “팔 좀 들어 봐.”

    그녀가 어정쩡하게 팔을 올리자, 비센테가 허리를 숙이곤 그녀의 다리 아래를 받쳐 들었다. 그 모든 접촉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머뭇거림이나 허락을 구하는 일조차 없었다.

    “…….”

    그녀는 제가 요 며칠간 아픈 몸을 핑계로 몇 번이나 그의 품에 스스로 안겨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추우면 춥다고, 더우면 서늘한 체온이 좋다고….

    아프다는 유세로 별별 핑계를 다 대며 그가 제 곁에 있기를 바랐고, 그는 제게 한정도 없이 품을 열어 주었다.

    그게 벌써 며칠째였다. 이제는 조금의 스스럼도 없이 그녀를 안아 들 만큼 서로의 몸이 익숙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몸은 좀 어때?”

    그가 그녀를 부드럽게 침대 위로 돌려놓으며 물었다.

    “많이 좋아졌어.”

    “울었어?”

    “아니야. 아….”

    엘레나는 뒤늦게 제가 두통 때문에 눈물을 조금 흘렸던 것을 기억했다. 몇 방울 떨어졌다가 흔적도 없이 말라붙었을 텐데, 알아차리는 눈썰미를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그녀는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머뭇거리다가 둘러댔다.

    “그냥, 머리가 조금 아파서.”

    이상한 환각을 보아서 그랬다는 말 대신 적당한 대답을 내놓자,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오늘은 그의 체온이 그녀의 것보다 서늘했다.

    “확실히 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열이 있는 게 아니라, 네 손이 서늘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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