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계단 근처의 문 몇 개는 건너뛰고 중간에 있는 문부터 열어 보기 시작했다. 하나는 예상대로 잠겨 있었고, 하나는 쉽게 열렸지만 그녀가 머물던 방은 아니었다.
그대로 문을 닫으려던 엘레나는 순간 멈칫했다. 벽을 장식한 초상화가 아주 익숙했다.
‘저건….’
카스타야 저택에 걸려 있던 ‘엘레나’의 초상화였으니까.
‘이게 대체 왜 여기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방 안으로 몇 걸음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 당혹스럽게 과거의 자신과 마주했다.
열아홉, 저 초상화가 그려졌을 때의 그녀였다.
정면을 응시하는 시선과 부드럽게 이완된 입술, 손에는 후작이 ‘비싸’ 보여야 한다며 들려 준 강아지까지….
황태자에게 바치기 위해 준비한 초상화였는데, 기껏 그려 두고서는 좀 더 이름 있는 화가에게 다시 그리게 한다며 방치되었던 그림이었다.
‘카스타야 가문의 것들은 대부분 불탔을 텐데.’
어쩌다 살아남은 가문의 보물은 있을지 몰라도 이렇게 직계의 것이라는 게 명확한 초상화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위험이었다. 그녀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이 방에는 사소하게 비센테의 흔적들이 묻어났다. 폰페라다 궁에서의 그 거대한 집무실을, 더 질 좋은 물건들을 사용해 그대로 옮겨 둔 것 같았다.
단정함도,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는 황량함도, 한쪽 벽면을 채운 책장이나 거대한 책상의 배치도….
아마도 비센테가 수도에 머물 일이 있을 때 사용하는 저택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다 내려놓고 휴식할 수 있는 안식처쯤.
‘벨몬테는 번잡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이목도 집중되어 있으니까.’
엘레나는 묘한 향수에 젖어 긴 책상으로 걸어갔다. 의자에 앉아 책상의 목재 질감을 느끼듯 쓸다가, 무심코 펼쳐진 ‘무언가’를 읽었다.
‘이건….’
휘갈긴 글씨로 빼곡하게 채워진 가죽 수첩이었다.
10/13 21:00 E의 실종 21:05 북쪽 성문-C의 감시 10/14 8:07 문지기를 그대로 매수하게 둘 것. 10/14 08:03…
도무지 규칙을 알 수조차 없는 시간의 나열이었다. 적힌 내용도 하나같이 아리송했고. 엘레나는 한 장 뒤로 넘겨 보았으나, 기록은 그게 끝이었다. 그녀는 수첩의 가장 첫 장을 펼쳤다.
5/7 장미 정원의 정비 지시-독사.
손끝이 떨렸다.
이게 다, 뭐지?
2/21 후원 3, 서고 2, 마부. E에게 호위를 붙일 것.
…7/1 23:01 이스팔가 서쪽 구역 폐쇄 23:20 통제 시작 23:40…
3/3 22:07 E후원-샴페인
심장이 아주 빠르게 뛰었다. 엘레나는 떨리는 손으로 몇 장을 더 뒤로 넘겼다. 어디를 어떻게 펼쳐도 사건들이 날짜와 분 단위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죄다 무슨 역사적 사실이라도 나열한 것처럼. 심지어 개중 몇몇은 그녀의 기억에도 있었다.
샴페인이나 이스팔가 서쪽 구역 폐쇄 같은 굵직한 일들은.
처음 봤던 페이지까지 다시 돌아오고 나서야 그녀는 뒤의 몇 장이 처음부터 뜯겨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차피 내용은 이제 머릿속에 더 들어오지도 않았다.
“…….”
엘레나는 제가 얕게 숨을 반복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랫동안 달린 사람처럼 숨이 찼다. 누군가, 목에 날카로운 칼날이라도 들이댄 것처럼 섬뜩한 소름이 돋았다.
수첩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은 모두 47번이었다.
사람의 죽음을 목적으로 한 납치, 암살, 약탈, 방화…. 차라리 계획적이기만 했으면 다행일 것이다. 우발적인 범죄처럼 보이는 사건도 있었고, 재해나 사고에 휘말려 갑작스레 죽은 사건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걸 기록한 사람은 그 ‘E’의 죽음을 막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그 E가 한 사람이라는 건 확신할 수 없긴 하지만.’
죽음을 막는 방법은 간단한 것도 있었지만, 가끔은 하나의 운명을 어그러뜨리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준비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신년 연회에서 총을 맞는 걸 방지하기 위해선 3주도 전부터 사건을 서서히 어그러뜨려야 했다. 가장 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것은 공화주의자와 연관된 1년 3개월이었다.
‘이 수첩의 주인에겐 예지 능력이라도 있던 걸까?’
엘레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에둘러 ‘수첩의 주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수첩이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비센테의 개인 공간에서 발견했고, 비센테의 필체인데 그가 아니면 대체 누구이려고.
‘그러면 여기서 47번의 죽음을 맞이한 E는… 나일까?’
그녀는 설핏 미간을 찡그렸다.
‘모르겠어. 샴페인 사건도 두루뭉술하게 써 놔서 확실하지 않고. 장미 정원에서의 꿈도 내 기억이라고 확신할 수 없어. 그날은 아주 평범했는걸.’
엘레나는 골똘히 생각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꿈은 꿈일 뿐 그녀의 과거가 아니었다. 저런 일을 겪은 기억은 정말 하나도….
‘잠깐. 정말, 하나도?’
그 순간 머리가 깨질 듯이 지끈거렸다. 이명이 쩌어엉 아프도록 귀를 울렸다.
엘레나는 입 속에서 터지는 신음을 뱉으며 허리를 수그렸다. 극심한 두통 때문에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