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부디 제게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애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녀의 손등을 덮고 있던 그의 손에 절박한 힘이 들어갔다.
그런 순간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다는 것처럼, 도저히 물러설 수 없는 문제인 것처럼.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던 청보라색 눈동자에 서서히 단호한 기색이 스몄다.
“기적이라고.”
길지 않게 이어지던 침묵을 끊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이렇게 돌아온 것을 기적 말고 달리 부를 말이 없다는 건 인정해. 네가 나를 얼마나 걱정하는지도 이제 알겠고.”
그가 그녀의 손을 도로 그 무릎으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엘레나. 네가 사는 것에 영원한 기적이 필요하다면,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
“이만 쉬도록 해.”
***
밤부터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의 영혼이 얼마나 부실하게 이 몸에 매여 있는지 보여 주려는 것처럼.
그녀에게만 잠시 유예되었던 시간이 버석한 모래처럼 손 틈으로 시시각각 흘러나갔다.
오한이 일 때처럼 춥고, 살이 에었다. 눈두덩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면 고였던 줄도 몰랐던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치밀었다. 겨우 몇 술 넘겼던 수프와 약마저 모두 토해 내자, 비센테는 제가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엘레나, 제발. 먹어야 해.”
가끔은 환각이 보였다. 환각은 힐다일 때도 있었고, 코라 또는 시에나, 아주 드물게는 카터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자주, 웬 금빛 실타래들을 보았다.
허공을 유영하는 가늘고 긴 선들은 그녀와 비센테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건 마치 아이가 반복적으로 덧그린 낙서 같았다.
꼬이고, 엉키고, 묶여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생긴 매듭인지, 풀 방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중간중간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깰 때마다 비센테는 그녀의 손을 절박하게 붙잡았다.
“미안해. 내가, 네게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너절해진 희망을 더없이 소중하다는 양 그러모으며, 그녀가 아픈 것을 죄다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네가 이렇게 아픈 줄도 모르고, 너무 내 생각만 강요했지….”
“…….”
“그럼에도 널 포기할 수가 없어서 더 미안해.”
그게 어떻게 네가 미안할 일이냐고, 무엇도 강요가 아니라고, 사실은 나도 네 곁에서 살기를 바란다고….
그런 염원을 단 한마디라도 건넬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에게 전해 봐야 서로만 마음 아플 바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입을 열면 목소리 대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빈말로라도 그는, 제정신이라고 볼 수는 없는 상태였으니.
“많이 아프지….”
“흐…읏….”
“조금만 참아.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추웠다가, 아주 얇은 천으로라도 몸을 감싸면 금방 뜨거워졌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게 선명하지 않고 뭉개지는 것 같았다. 흐릿했다.
누군가 비센테에게 열을 떨어뜨려야 한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었던 이불을 누군가가 빼앗았고, 차가운 수건이 그녀의 몸을 연신 닦아 내는 게 느껴졌다. 엘레나는 계속 비명을 질렀다. 추워, 아파, 추워….
“제발, 엘레나. 여태껏 잘 견뎌 왔잖아….”
비센테는 그녀를 끌어안고 거의 빌다시피 했다. 그녀는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제게 주어진 온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이것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아무리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고 해도 아픈 사람, 그것도 여자의 힘인데도 그는 무엇도 떨치지 못했다. 하다못해 제 목덜미에 아프게 박힌 그녀의 손톱조차도.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그게 못내 서러웠다.
***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거짓말처럼 몸이 멀쩡해져 있었다. 지난 며칠간 그 지독한 유난을 떨어 댄 게 마치 제 몸이 아니었던 것처럼. 지나치게 멀쩡하다 못해 심지어 가뿐하기까지 했다.
이마를 짚어 보니 열이 오르던 것도 사라진 것 같았다.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는 시선에 비센테가 보였다. 그는 침대에 얼굴의 반절을 묻고 잠들어 있었다.
그 귀한 무릎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꿇은 채로….
며칠째 제대로 잠도 못 자고 그녀의 수발을 들다, 열이 내리니 비로소 안심이 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언제 사람을 찾을지 모르니 곁에서 애써 버티다 잠들었으리라.
“…….”
엘레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 줄까 고민하다가, 지난 동굴에선 기어이 그를 깨우고 말았던 것을 떠올렸다.
잠결에라도 제게 닿는 것에는 예민히 구는 성정이었다. 모처럼 잠든 것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목이 말라….’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헤치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며칠 앓아누웠다고 땅을 제 발로 딛는 감각이 조금 생소했다. 대충 주운 숄 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섰다.
해가 저무는데도 불을 밝히지 않아 복도는 어둑했다. 엘레나는 저택의 어디에서도 기사나 하인은커녕, 하다못해 심부름꾼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묘함을 느꼈다.
마치 이 거대한 저택에 그들 둘만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선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물을 마셔야겠어. 수프를 가져오던데, 아예 일하는 사람이 없진 않겠지.’
그녀는 어렵지 않게 부엌을 찾아냈다. 솥에서 다 끓여진 물이 식어 가고 있었고, 불을 피운 흔적도 찾았지만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소득도 없이 물 몇 모금을 마신 뒤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방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몰랐던 여러 개의 문들과 마주했다.
‘하나씩 열어 보면 되겠지…. 들어가선 안 되는 방은 문을 잠가 뒀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