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끌거리는 목소리는 불유쾌한 음색으로 튀어나왔다. 비센테가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유리잔에 물을 채운 후 그녀에게 내밀었다.
“물부터 마셔.”
어쩐지 목이 지독히 마른 것도 같았다. 그녀는 눈썹을 찡그리며 잔을 받아 물을 몇 모금 삼켰다. 잔에서 입술을 떼자, 비센테가 곧바로 그녀의 손에서 잔을 받아 치웠다.
“여긴, 어디야?”
이번에는 조금 더 매끄럽게 들렸다. 잔을 사이드 테이블 위로 돌려놓은 손이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금 매끄럽게 동작을 이었다.
“내 사저. 비야톨레드에 있는 것 말고, 비스케이 구역이야.”
“비스케이… 구역이라고?”
분명 그녀의 마지막 기억은 황궁이었고, 심지어 백작 부인의 별궁이었다. 황제가 방문한 도중이었고… 그리고 장미 정원…. 이벨린은 미간을 찡그리며 이마를 짚었다.
기억이 아주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비센테의 서늘한 손이 그녀의 눈가를 덮었다. 시야가 어둑하게 가려졌다.
“머리 아프면 생각하지 마. 앞으로, 너는 무엇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서럽도록 다정한 음성이었다. 현실에서 기꺼이 눈 돌리고 싶게 만드는….
엘레나는 잠시 그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손을 단호하게 붙잡아 내렸다.
“…여긴 대체 어떻게 오게 된 거야?”
“네가 갑자기 기절했어.”
“기절.”
“갑자기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서… 황궁의에게 보일 순 없으니 당장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어. 단테와 루카스가 도왔고.”
비야톨레드의 사저로 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곳에 ‘귀족들’의 시선이 모여드는 곳이기 때문일 터였다. ‘이벨린 로즈 레녹스’는 아직도 지명 수배범일 테니까….
그녀는 희미하게 동이 터 오기 시작한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들이 만난 게 새벽에 가까운 밤 즈음이었고, 황궁에서 마차로 벨몬테의 외곽인 비스케이 구역까지 달렸다면 족히 서너 시간은 걸렸을 터였다.
그러니, 동이 틀 시간은 진즉 지나 있었어야 맞는데…. 위화감이 선명했다.
엘레나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던 거야?”
“사흘.”
“말도 안 돼….”
“너는 지난 사흘간 숨도 겨우 쉬는 것 같았어.”
“…….”
“이번에야말로 못 깨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가 마른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 너머로 안도가 선명했다. 그녀는 금세 말라붙은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는 이제 알겠어. 그런데 여기 있어도 돼? 내가 알기론 아마 오늘부터….”
비센테가 고개를 저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모든 것들을 치우고 있어. 너를 이 나라 밖으로 안전하게 빼내는 게 우선이야.”
“…이 나라 밖으로 빼낸다고?”
“걱정하지 마. 네가 가는 곳이 어디든 나도 동행할 테니까.”
“복수는?”
그녀는 황망하게 되물었다.
“너를 지키는 게 우선이야, 엘레나. 어떤 것도 그것보다 우선할 수는 없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행복하다면, 그게 비센테 너의 행복이라면. 그의 의견에 따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그가 카스트로의 총칼을 피해 평생 도망자의 신세로 살게 될 것을 떠올리면 서글펐다.
차라리 반역이든 복수든 성공해서, 어떻게든 황제가 되어 삶을 이어 가도록 설득할 작정이었는데….
‘게다가, 나를 지키는 게 우선이라니.’
엘레나는 막막한 숨을 터트렸다.
어떻게 말해야 아무도 다치지 않고, 그를 제대로 설득할 수 있을까?
이 몸은 곧 기간이 다해 끊어질 거라고, 그녀의 영혼은 곧 안식으로 돌아갈 거라고,
그러니 부디 네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택하라고….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이상 몸을 되찾으러 돌아가기엔 늦었고, 늦지 않았어도 위험했다. 이대로 비센테를 따라 도망친다면 힐다의 말대로 그녀의 영혼은 사라질 터였다. 수십 번은 고민했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이벨린은 단호할 수 있었다.
“아니. 싫어.”
“싫다니….”
“나는 이 나라를 떠나지 않을 거야. 비센테, 나는 카스트로에게 복수하고 싶어.”
“…….”
“그래서 네가 황제가 되었으면 좋겠어. 네가 나 때문에 포기했던 것들을,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다 누렸으면 좋겠어. 매 순간마다 생의 즐거움을 알기를 바라고, 소소하고 긴 행복이 네 인생에 이어지기를 바라.”
그녀의 손짓대로 비센테는 침대의 끄트머리에 앉았다. 이벨린이 그를 향해 손을 뻗자, 그가 그녀를 향해 상체를 살짝 수그렸다. 그들 사이에 엷은 그늘이 졌다.
“…….”
엘레나는 조금 머뭇대다가 비센테의 뺨에 제 손을 살짝 가져다 댔다. 처음에는 손끝이나 살짝 닿았던 것이, 손가락이 되고, 이윽고 용기를 얻고 손 전체로 그의 뺨을 감쌌다.
비센테는 그녀의 체온에 안도하듯 눈을 내리감았다. 긴 속눈썹이 뺨에 음영을 드리웠다. 그가, 그녀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부디 충만한 삶을 살아, 비센테. 이 삶은 온전히 너의 것이야. 내게 주지 마.”
그 말에 비센테의 눈매가 슬프게 일그러졌다.
엘레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끔은 듣는 사람이 아프더라도 전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
그의 인생을 위해서, 그녀가 사라진 이후의 삶을 그도 대비해야 하니까.
“너는 가끔씩 나에게 아주 벅차니까….”
“…….”
“지금 내가 이 몸에 깃든 건 기적이야. 그리고, 세상에 영원한 기적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