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엔리케도 몰랐다는 거겠지.’
결국 주변 모두를 속여 왔다는 뜻이었다. 제게 미래가 있는 척, 황좌를 탐내는 척, 대단한 대의가 있는 척.
실제로는 황제와 카스트로를 고꾸라뜨리면, 그것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는 언제든,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도무지 어찌할 수 없이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엘레나가 휘청거리자, 그가 급히 몇 걸음 다가와 그녀의 팔뚝을 붙잡았다.
정말 반사적인 행동이었던 것 같았다. 엘레나가 겨우 중심을 잡자,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받쳤다.
“미안해…. 네가, 이러다가 아주, 넘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
“당장 닿는 것도 불쾌하겠지만, 네가 다칠 것 같아서… 조금만 참아.”
엘레나의 눈매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참으라고. 제가 마치 어떤 역병이나 더러움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선을 들어 올리자 여전히 물기에 젖어 있는 청보라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제가 여태 울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잘못 만지면 그대로 고꾸라져 죽을 작은 생물을 앞에 두고, 그저 부드럽게 받치는 손이 어떤 중대한 위협이라도 될까 두려워하면서.
그는 제가 대체 어떤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고나 있을까….
“비센테.”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얌전히 고개를 수그렸다.
“응. 엘레나.”
엘레나는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모르는 사람처럼 머뭇거렸다.
이 순간만을 고대했으면서도 기어이 그가 진실을 알게 된 것은 여전히 끔찍했다.
소멸. 다시 한번 사라질지도 모르는 가능성. 그녀를 잃었을 때… 그가 이번에도 버틸 수 있을까?
침묵이 길어지자 그가 머뭇거리며 손을 뗐다. 안 그래도 미약하던 혈색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네가 나를 보고 싶어 하지도 않으리라는 걸, 정말 미처 생각도 못 했어. 그러면 내가, 다음에 다시… 물론, 네가 허락한다면….”
“비센테, 나는.”
공황처럼 이어지던 비센테의 말이,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잡아먹히듯 사라졌다.
“나는 정말 너를 단 한 번도 원망한 적 없어.”
그녀의 말에 애써 침착을 가장하던 그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대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것처럼.
“그때… 네게 독을 요청했을 때, 나에게 너는 그 끔찍한 곳을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구원자였어. 너는 나를 분명히 구원했어. 나를 죽이거나, 더 큰 절망으로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엘레나는 허공에 여전히 떠 있던 그의 손끝을 살짝 붙잡았다. 그 접촉에 비센테가 어깨를 움찔 떠는 것이 보였다.
“정말 수백 번을 다시 태어나도 그 빚을 갚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 나는 정말 그곳만 벗어날 수 있으면 무엇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어.”
“…….”
“내가 폰페라다 궁까지 너를 찾아간 것도,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아니야, 엘레나. 너는… 진실을 몰라.”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비센테가 이를 악문 채 내뱉었다. 그 순간, 엘레나는 두 번째 현기증을 느꼈다. 어쩐지 아까부터, 자꾸만 눈앞이 흐려진다 싶었더니….
흐릿하게 끊어지는 정신에 비센테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너는 그날, 죽지 않았어야 했어.”
***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예닐곱 살쯤 되어 보였다. 짙푸른 녹음, 흐드러지게 핀 붉은 장미와 흰 피라칸사스, 잘 정비된 잔디.
엘레나는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장소가 별궁의 장미 정원이라는 것을 쉽게도 알아차렸다.
지금은 바섬 백작 부인이 쓰고 있는 별궁, 그중에서도 장미 정원은 시에나가 황후였던 시절 유독 사랑했던 공간이었다. 그 정원을 즐기느라 5월 무렵이면 시에나는 본궁보다도 더 자주 별궁에 머물렀었다.
‘그러니까, 이날은 바로….’
비센테의 초대를 빙자한 시에나의 초대를 받아, ‘티 파티’에 참석했던 날이었다. 그녀는 주제도 모르고 조금 들떠 있었다.
황궁에 들어가는 날에는 좋은 옷을 입고,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맞는 엄격한 훈육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어느새 멀어진 시선에 사람들이 잡혔다. 질 좋은 초상화를 그대로 박제해 둔 것같이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
엘레나는 장미 덤불 근처에 주저앉아 네잎클로버를 찾고 있었고, 비센테는 덤불에서 장미 몇 송이를 따고 있었다. 시에나와 시녀들이 온화하게 웃으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풀숲 사이에서 번들거리는 비늘을 언뜻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들이닥친 ‘엘레나’의 죽음.
***
“아….”
엘레나는 깨질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 닥쳤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끊기기 전의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니까 비센테와 대화를, 아니, 장미 정원을….
“…깼어?”
반쯤 잠긴 음성이었다. 그게 비센테의 목소리라는 것을 인지하자 시야가 확 트였다. 그녀가 누워 있는 것은 푹신한 침대 위였다. 드리워진 휘장이며, 침대 기둥이… 백작 부인이 내주었던 방과는 완전히 다른 장소였다.
엘레나는 당혹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방 안의 모든 사물들이 섬세하고 정교하긴 했지만, 이곳은 절대 황궁은 아니었다.
비센테는 침대 곁의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태 그녀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았다. 상체를 일으키려고 바르작대자, 그가 서둘러 다가와 그녀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등 뒤에 쿠션을 받쳐 앉을 수 있도록 도왔다.
“여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