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너머에 있을 사람을 생각하면 그저 까마득했다.
내가 감히 널 다시 봐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무슨 염치로 네 눈에 나를 담게 하려던 것인지…. 주제도 모르고, 감히, 나 따위가 어떻게….
…네가, 나 때문에 다시 죽기라도 하면 어쩌지.
그 문장을 떠올리자 덜컥 겁부터 났다. 그는 치미는 현기증에 이마를 짚었다. 손은 발작적으로 떨리다 못해, 강박증이 있는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다시, 그녀가 그의 앞에서 처음 죽었을 때처럼 까마득했다.
“…….”
비센테는 입에 고인 숨을 밀듯 뱉어냈다. 습관처럼 들이켰다. 숨은 폐까지 가지도 못한 채 다시금 입에 고였다. 그제야 그는 제 상태를 인정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숨을 어떻게 쉬더라? 호흡, 들이쉬고, 내쉬고, 다시….
“아야야, 으….”
그가 마침내 온전히 숨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 안에서 들려온 인기척 덕분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녀, 그러니까… ‘엘레나’.
무엇을 어떻게 하다가 어디에 세게 부딪치기라도 했는지 아픔을 참는 신음이 짧게 이어졌다. 그제야 그는 제가 지나치게 오래 복도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갑던 문고리가 그의 체온으로 미지근해져 있었다.
“…….”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녀는 무방비했다. 순진한 초식 동물처럼 무방비하게 그에게 헐벗은 등이나 내보였다.
제 살인자가 등 뒤로 다가가는 것조차 모른 채. 그가 그녀를 여전히 기만하는 것조차 모른 채.
어느 순간 그녀가 어깨를 움츠리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제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은 것 같았다. 침묵을 지킨 것은 무엇부터 뱉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묻고 싶은 게 그녀만큼이나 많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밖에 폐하의 기사들이, 엄청 많다고 들었는데.”
엘레나. 왜 날 보러 폰페라다 궁까지 왔어?
“저도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알았으면 진작 도망갔겠죠. 전하께서 제게 주신 게 너무 많으니까, 조금만 은혜를 갚는다는 게.”
대체 왜 그렇게까지 했어? 증오하던 카스트로조차 견디고…. 복수가 네게 그렇게 중요했어?
“아무래도 화나셨죠?”
왜 처음부터 너라고 밝히지 않았어? 내가 너를… 이번에도 해칠 것 같았어? 매번 너를 지켜 주지도 못하니까….
“엘레나.”
기껏 새로운 몸을 잡았으면, 그냥 너 좋을 대로 편하게 살지…. 이 지옥이 대체 뭐라고, 여기에 도대체 남은 게 무엇이 있어서.
“…빌어먹을, 엘레나 데 카스타야.”
너는 꼭, 네가 내게 보내는 복수 같았어.
***
비센테가 그녀의 이름을 ‘그렇게’ 부른 순간, ‘엘레나’는 모든 기만이 기어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모든 것을 확신하고 온 것이다. 어떤 망설임이나, 떠보는 행동, 말이나 눈빛이 아니라….
엘레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를 마주하는 것에는 온몸의 용기를 모두 끌어모아야 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선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조금씩 옮겼다.
“…….”
핏줄이 툭 불거지도록 꽉 쥔 손, 호흡이 가빠진 상체, 무언가를 꽉 눌러 참듯 핏대가 선 목울대, 굳은 턱과 콧날, 그리고….
비센테는 눈을 깜박이는 법조차 잊은 사람 같았다. 새하얗게 얼어붙은 얼굴에는, 지옥과 천국을 동시에 목도한 사람의 혼란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났다.
“너잖아. 네가 맞잖아….”
그의 목소리는 아주 황망해서 흐느끼는 것처럼 들렸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끌어안아야 족할 것처럼 올라왔던 그의 손은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멈춰 섰다. 차마 그녀에게 닿지도 못한 채 도로 주먹 쥔 채 내려갔다.
비센테가 우아한 눈매를 왈칵 일그러트렸다.
“대체 어쩌자고 너라는 걸 밝히지도 않았어? 감히 어떻게 네게 그러도록… 나를 내버려 둘 수가 있었어? 내가 매번… 실패해서 그랬어?”
그는 지극히 위태로워 보였다.
“아니야. 내가 다, 다 잘못했어. 내가 너무, 바보 같지. 내가, 어떻게 너를 몰라보고…. 네가, 나는, 네가 너무 너처럼 보여서, 도저히….”
서 있는데도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았다. 죽음을 등진 사람 같았다. 그간 있었던 과거를, 모조리 헤집어, 그 스스로를 찌르는 칼날로 삼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
그가 치받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들어 제 이마를 짚었다. 얼핏 눈가에 눈물이 비친 것도 같았다. 엘레나가 놀라서 손을 뻗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저는 감히 그녀의 손길을 느낄 자격도 없다는 양….
벌려진 거리만큼 현실감이 돌아온 듯 보였던 청보라색 눈동자가, 이내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다시금 무너졌다.
“너는, 네가 내게 보내는 복수 같았어.”
“…비센테.”
“널 닮은 여자를 보면서 내 죄를 떠올리라고, 괴로워하라고…. 너를 무심코 욕망하는 나를 용서할 수조차 없었어. 감히 내가 네게 무슨 짓까지 했는데, 내가 너를 두고 어떻게….”
창백하게 질린 그의 뺨 위로 한 줄기 눈물이 뚝 흘러내렸다. 이내 악물었던 입술부터 젖어 들었다.
“어떻게, 나 혼자 살 생각을 해….”
어떻게 내가 너를 두고 혼자서 살아갈 생각을 하느냐고. 달리 말하면, 어떻게 미래를 생각하느냐고.
엘레나는 기막힌 숨을 터트려야 할지, 그를 안고 달래야 할지 갈피조차 못 잡았다. 지독하게 치민 감정이 목구멍을 꽉 틀어막았다.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 한 번 한 번이 매웠다.
그 문장을 기어이 저 귀한 입으로 읊었을 때, 엘레나는 비센테가 세운 복수의 종착점을 깨달았다.
그는 처음부터 황제가 될 생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번도 황제가 되는 미래를 꿈꿔본 적이 없었다.
이 모든 복수가 끝나면, 스스로 죽을 작정이었을 테니까.
엘레나는 황망한 와중에도 엔리케가 공유해 주었던 자료의 초안을 떠올렸다. 비센테가 사라질 때를 상정해 둔 몇 개의 자료들은 명백하게 수상쩍었지만, 그때 당시엔 특유의 조심성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준비하던 엔리케의 덤덤하던 낯도 같이 떠올렸다.
아무리 저 혼자 대단한 책사라고 해도, 곧 죽을 사람을 위해 반역을 시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목숨에 미련이 없다는 건 무모한 계획을 시도할 확률이 높다는 뜻이고, 무모하다는 건 결국 계획의 실패와도 직결되니까.
그야말로 다 같이 끌어안고 자살하는 꼴일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