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피치 못할 상황이 처한 게 아니라면야… 진짜 수상하지.’
물론, 장미 정원으로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예닐곱 살 때부터 황제가 머무는 본궁을 제외한 곳의 비밀 통로를 몇 군데 알고 있었으니까.
그 무렵의 비센테가 그녀와 늘 무엇이든 공유하고 싶어 한 덕분이었다.
남은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는 것만 믿고, 정작 그 약속이 어른들의 사정에 의해 얼마든지 어그러질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둘 다 맹목적으로 순진했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잘 만들어진 함정일 수도 있지.’
물론 이게 함정이든, 배신이든, 혹은 정말 그녀의 탈출을 돕기 위해서든, 뭐가 됐든 지금은 따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아멜리아가 오늘 저녁 찾아오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몸’의 위치를 알 수 있기만 한다면야….
어떤 위험이든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벨린은 쪽지를 잘게 찢어 벽난로에 태웠다.
“목욕물을 준비해 드릴까요?”
불을 들쑤시던 부지깽이를 내려놓자 하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감사한 제안이었다. 벌써 며칠째 뜨거운 물은커녕, 세숫물조차 구경하지 못했으니까.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자 어쩐지 시큼한 냄새마저 나는 것 같았다.
이벨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갈아입을 옷도 좀 준비해 줄 수 있을까요? 드레스는 당장 구할 수도 없을 테니까, 적당한 것이면 아무거든 괜찮아요 하녀복도 괜찮고요.”
“알겠습니다.”
하녀는 겨우 그런 옷을 입어도 괜찮겠느냐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빠르게 방을 나섰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뜨거운 물이 준비되었다.
그녀는 간만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물에 온몸을 푹 담그는 호사를 누렸다. 뼛골까지 스며들었던 냉기가 사라지며 쿡쿡 쑤시던 몸살 기운도 잠깐은 완화되는 것 같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이 몸에 들어선 이후로 더 자주 아픈 것 같지?’
제 몸이 아닌 것을 제 것인 양 차지한 후유증인 걸까? 조금만 무리하거나, 찬 기운을 쐬면 곧바로 열이 오르고 온몸이 욱신거렸다.
이벨린은 손바닥으로 몇 차례 물을 떠올려 얼굴을 씻은 후, 물먹은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그러모아 쥐었다. 시선을 조금 내리자 일렁이는 수면에 흐릿한 형체가 비쳤다.
‘이벨린’의 몸과 얼굴, 죽어도 제 것처럼은 느껴지지 않는….
애써 외면하고 있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열에 들뜬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만약 아멜리아가 정말로 ‘몸’의 위치를 알고 있고, 그래서 원래의 몸을 되찾게 된다면. 이 ‘이벨린’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고 보면 거의 몇 년 동안 달거리를 하지 않았잖아.’
처음부터 의심하지 않았던 건 본래 ‘엘레나’도 썩 몸이 건강한 편이 아니라, 심할 땐 반년씩도 건너뛰었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두 달쯤 늦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게, 따지고 보면 벌써 3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배가 고프다거나 뭘 당장 먹어야겠다거나, 그런 생각이 든 적도 없고….’
그렇다고 생명 유지에 필요한 행동을 아예 안 하느냐고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잠도 자고, 아프기도 했고, 땀도 나고, 눈물도 흘렸다. 뭔가를 마시거나 먹는 것도 조금이지만 꼬박꼬박 빼놓지 않고 했다. 정말 딱 죽지 않을 만큼만이지만.
‘원래부터도 욕구가 적었으니까 내 성향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르지. 흔히 육체는 영혼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하니까.’
이벨린은 힐다가 준 목걸이를 버릇처럼 꽉 쥐었다.
‘힐다를 다시 찾을 수만 있으면 좋을 텐데. 분명히 뭔가 알고 있을 테니까….’
아쉽게도 그날 이후로 힐다의 소식은 뚝 끊어졌다. 사람을 풀어 수소문을 해 보았지만, 행방은커녕 비슷한 사람을 봤다는 목격담조차 없었다. 마치 순식간에 땅이나 하늘로 사라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때 문을 살며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벨린은 턱끝까지 물속에 푹 담근 채 웅얼거렸다.
“들어와요.”
“물 온도는 괜찮으세요?”
수증기로 가득 찬 욕실의 문을 연 하녀가 옷과 타월을 마른 의자 위에 놓아두며 물었다. 이벨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지었다.
“딱 좋아요.”
“그럼 다행이구요. 간단히 요기할 만한 것을 바깥에 준비해 뒀어요. 오늘은 이 방 바깥으로 나오시면 안 돼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급작스러운 통보에 이벨린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하녀는 그 부자연스러움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순순히 대답했다.
“폐하께서 방문하셨어요. 본래는 백작 부인께서 본궁으로 가시는데, 오늘따라 별궁으로 오셔서…. 수행하는 기사들도 그렇고 시종들도 늘어나서, 방 안에 얌전히 계셔야 한다고 백작 부인께서 거듭 당부를 전하셨어요.”
“…폐하께서요?”
“네. 아가씰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문은 바깥에서 잠글 거예요. 필요하신 게 있다면 지금 말씀하시면 가져다드릴게요.”
어차피 문을 바깥에서 잠근다면, 아멜리아가 열고 들어오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터였다. 이벨린은 잠깐 생각하는 시늉을 하고는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지금 당장은 생각나는 게 없어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그럼 나가면서 바로 문을 잠글게요. 욕조 물은 그대로 두시면 아침에 치울 거고… 아까 보니까 미열이 있으신 듯해서 약을 받아왔어요. 여기 옷 옆에 둘 테니 몸이 따듯할 때 드세요. 속옷은 여기 있구요. 아, 방 안에 있는 책은 아무거나 읽어도 좋다고 하셨어요.”
하녀는 이것저것 당부한 뒤,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욕실 문을 닫고 나갔다. 그녀에 대한 온갖 악명을 들었을 텐데도 시종일관 상냥한 태도였다.
‘그나저나 혹시 몰라서 하녀복으로 준비해 달라고 하길 잘했지. 황제께서 직접 방문하실 줄은….’
황제의 기사들은 ‘이벨린 로즈 레녹스’를 연회장에서 한 번씩은 지나쳐 본 적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때의 화려한 모습을 기억하는 자들일수록, 그녀가 하녀복을 입고 이사벨라의 별궁에 숨어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 할 테니까.
‘물론, 이사벨라의 부탁을 들어주려면 얌전히 숨어 지낼 운명도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아멜리아가 오기로 한 시간까지는 좀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물이 식을 때까지 느긋하게 목욕을 즐겼다. 루파에 물을 듬뿍 적셔 팔꿈치를 문질러 닦고, 비누로 머리도 꼼꼼하게 감았다.
그녀는 따끈해진 몸에 큼직한 타월을 두르고 옷과 약병을 챙겨 벽난로 앞에 앉았다.
벽난로의 불을 쬐며 느긋하게 확인한 하녀 복은 등 뒤로 둥근 단추가 촘촘하게 달려 있었다.
이벨린은 잠깐 숨을 들이켰다가, 헛웃음을 숨처럼 뱉었다.
‘…이걸, 정말 혼자서 입으라고….’
그녀는 주섬주섬 검은색 모직 원피스에 팔과 다리를 끼워 넣었다. 어떻게 손이 닿는 부분까지는 간신히 몇 개를 채웠지만, 날개뼈 아래쪽 몇 개는 도무지 그녀의 손재주로는 불가능했다.
‘그래도 어떻게 잘하면 될 것 같은데….’
끙끙대며 몸을 요리조리 뒤틀던 찰나였다. 그녀의 등 뒤에서 잠금쇠가 풀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벨린은 도와줄 사람이 때마침 도착한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곳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조금 전의 그 하녀가 아니면 아멜리아일 테니까.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그러모으며 무방비하게 등을 보였다.
“아, 마침 잘 왔어요. 혹시 이것 좀 마저 채워줄 수 있어요?”
“…….”
“손이, 아무래도 안 닿아서….”
주섬주섬 주워섬긴 변명에 얼어붙듯 서 있던 그림자가 그제야 움직이는 것이 곁눈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