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151)
  • 이 모든 게 함정이 아니라는 확신, 이사벨라가 그녀를 단순히 ‘쓰고 버릴’ 패로 여기지 않는다는 확신이….

    이벨린은 야윈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그 대답이 모든 걸 설명할 순 없어요. 저는 좀 더 명확한 시점을 원해요. 당신이 왜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는지.”

    이사벨라의 얼굴에서 한 번 더 표정이 사라졌다.

    “내가 굳이 널 설득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네 거취는 이미 내 손에 있고, 나는 이미 이 관계에서 충분히 우위에 있는 것 같은데.”

    “한낱 고아 계집 출신인 저도 당신에 대한 소문은 몇 번이나 들었죠. 세간에서는 당신을 두고 이렇게 말하더군요.”

    “…….”

    “황제의 첫사랑이자 희대의 요부, 바섬의 수치, 야심으로 남편마저 버린 여자, 그리고….”

    “…….”

    “황후의 애완견.”

    지루한 나열을 듣듯 테이블 위의 문양이나 훑던 이사벨라의 눈이, 이벨린의 마지막 말에는 바짝 치켜 올라갔다. 늘 버석하게 메말라 있던 그녀의 눈동자에 파르라니 타오르는 증오가 어렸다.

    이벨린은 이사벨라의 증오와 분노를 여상한 낯으로 견뎠다.

    “당신이 말이 맞아요. 제 거취는 이미 당신의 손에 있고, 관계의 우위도 당신이 점하고 있죠. 그런데도 제게 이렇듯 구구절절 털어놓은 것을 보면, 당신은 제게 원하는 게 있는 거예요.”

    “…….”

    “아마도 그건 저만 들어줄 수 있는 것일 테고요. 하지만 제 입장에선… 글쎄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서 제가 위험을 무릅쓸 이유는 조금도 없어요.”

    “…….”

    “어차피 제 처우를 결정하는 건 2황자 전하일 테니까….”

    사실 비센테를 거론한 것은 반쯤은 도박수였다. 그와 맺었던 계약은 브리타냐행 배표를 받았던 그날에 사실상 끝이 났고, 이제 비센테에겐 그녀를 책임질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때 있었던 일을 아는 것도 둘뿐이었다.

    어차피 이번 ‘구출’에도 엔리케가 입김을 썼을 테니까, 따지고 보면….

    “내가 스물두 살에 황제의 침실로 끌려 들어갔을 때.”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이벨린은 이사벨라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사벨라의 우아한 얼굴엔 생경한 증오가 어려 있었다.

    “제발 이러지 마시라 울며불며 몇 달을 지냈다.”

    그 말을 힘겹게 뱉은 이사벨라의 목에 핏대가 섰다. 그때의 슬픔과 분노, 절망을 지금에도 생생하게 느끼는 것처럼. 그 얼굴을 보고 나서야, 이벨린은 과거 사교계에서 망령처럼 떠돌던 기이한 소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사벨라 바섬이 사실 제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고, 때문에 황제의 침실 시중을 몇 달이나 거부했다고. 그때의 패악이 그 순한 여자답지 않게 대단했다고…. 이제 와선 누구도 믿지 않을 해묵은 이야기였다.

    영지에 틀어박힌 채 외부 활동을 극도로 제한하는 바섬 백작조차 차마 믿기 힘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태동이 느껴졌어.”

    이사벨라의 고백은 제 약점을 감추어 핥는 짐승처럼 드문드문 이어졌다. 고통스러웠던 순간의 감정들을 차마 구구절절 입으로 옮길 수 없다는 듯. 그러나 눈빛에선 도저히 감출 수 없는 회한이 묻어났다.

    “이안을 처음 받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지. 아이에게 그 아비를 투영해, 미움이나 증오를 느낄까 전전긍긍했던 시간이 우습게도.”

    “…….”

    “그날 황후께선 내게 부디 예쁜 인형으로 남으라, 그리 당부하시더구나. 그렇게 지내면 너도, 자식도, 영지의 네 비참한 남편도 모두 살리겠다고. 언젠가는 반드시, 바섬으로 돌려 보내주겠노라고. 네가 나를 위해 황제께 사소한 말 몇 마디를 올려주고, 몇 가지 번거로운 일들을 해 주면….”

    “…….”

    “그 간사한 계집의 말을 믿었다. 그날부터 나는 그 계집의 눈과 귀와 혀가 되었지. 그 모든 것들이 내 숨통을, 내 아들의 숨통을 조르는 것인 줄도 모른 채.”

    새파랗게 질린 이사벨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연약해 보였고, 동시에 새로운 증오로 시시각각 스스로를 벼려 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안이….”

    제 아들의 이름을 발음하는 이사벨라의 목소리는 꽉 메인 채 떨렸다. 그녀는 긴 호흡 몇 번으로 숨과 울음을 모두 참아냈다.

    “사라진 뒤에야 제정신이 들었지. 2황자께서 내게 접촉했을 땐 그저 기뻤다. 이 모든 게 끝나겠구나, 내 손으로 저들을 끝장낼 수 있겠구나….”

    “…….”

    “사실 이 배 속엔 저주받을 황제의 씨가 없단다.”

    고통 속에서 과거를 되짚던 목소리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또렷해졌다. 이벨린은 죄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차마 이사벨라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제가 댄 칼날이, 너무 깊게 상대를 찌르고야 말았다는 걸 깨달은 어설픈 살인자처럼….

    “이제, 전부 알았어요…. 그러니 그만, 그만 말씀하셔도 돼요.”

    그 말대로였다. 어긋났던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들어맞기 시작했다. 황제가 왜 굳이 비센테의 유폐를 풀었는지, 이사벨라가 왜 비센테에게 유리하도록 판을 이끌어가고 있는지, 계승권을 지닌 아이가 있다면 마땅히 경계해야 할 자에게 군권마저 쥐여 주면서….

    처음부터 이사벨라는 미치광이 황제와 황후, 황태자를 전부 끌어안고 죽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의심이 깊어서….”

    이벨린은 덜덜 떨리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의자를 조금 더 당겨 앉은 이사벨라가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덥석 붙잡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벨린의 얼굴에 이사벨라가 거짓말처럼 웃었다.

    “이벨린. 네가 나를 위해 해 주어야 할 것은 하나란다.”

    “무엇이든,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카스트로, 그 살인자가 내 아들이 묻힌 곳을 숨긴다. 내 이안이 어디에 있는지, 만약 태워졌다면 그 재는 어디에 뿌렸는지, 유품은 어디에 버렸는지…. 네가 그것만 알아 와 준다면….”

    “…….”

    “내 너를 위해 무엇이든 하마.”

    ***

    새벽 1시에 조용히 뒤쪽 장미 정원으로 나와요. 탈출을 돕겠습니다. -E-

    이벨린은 웬 하녀가 건네주고 간 책에서 반으로 접힌 쪽지를 발견했다. 쪽지는 심지어 귀퉁이마저 찢어져 있었다. 누군가 다급한 사정으로 휘갈긴 후 잡히는 대로 찢어 건네준 것처럼.

    이벨린은 아주 수상쩍은 것을 보듯 눈매를 좁혔다.

    ‘필체는 엔리케의 것이 맞기는 한데….’

    갑자기 다짜고짜 쪽지로 부르는 게 적잖이 수상했다. 게다가 아무리 책에 끼워 두었다곤 하지만 그 철저한 남자가 이런 내용을 굳이 글로 남겨서 다른 사람의 손까지 타게 했을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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