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51)
  • 엔리케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2황자를 바라보았다. 2황자와 알고 지낸 세월이 제법 길다고 자신하는데도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다. 까마득한 벼랑 끝에 간신히 붙어선 채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 같았다.

    쪽지를 당장에 구겨 쥘 것처럼 손등에 바짝 선 핏줄이 아니었다면, 엔리케는 그가 선 채로 정신을 잃었다고 해도 믿었을 터다.

    “…….”

    감히 쥘 수조차 없다는 듯, 바짝 벌어진 채 굳은 손가락 틈으로 엔리케는 간신히 비센테의 경악을 헤아렸다. 그는 숨조차 잊은 듯했다. 무엇으로 찍으면 쩡 소리를 내며 갈라질 것 같았다.

    도대체 저 서명의 어디가 냉정한 사내를 저토록 몰아붙였나.

    평민치고 다소 힘 있고 우아한 필체이긴 하지만 여러모로 평범한….

    “어디에 있다고?”

    “…예?”

    “엘, 아니, 이벨린은. 지금 어디에 있지?”

    “아, 아직 황궁에 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시간을 주시면….”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비센테는 몸을 돌렸다. 문을 잡아 여는 힘이 급했다. 엔리케는 당혹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전하? 설마… 전하!”

    ***

    “차는 별로 안 즐기나 봐요.”

    그 말에 이벨린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몸살의 전조 탓에 좀처럼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물론, 그보다 앞서서, 도저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은지 모르겠다는 게 일차적 이유였고.

    “그러니까….”

    이벨린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둥근 테이블에는 네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앉아 있는 사람이 셋, 그 뒤에 얌전히 손을 모은 여자가 하나였다.

    오른쪽에서부터 바섬 백작 부인, 아멜리아, 그녀 자신 그리고… 다시 바섬 백작 부인의 뒤편에 선 ‘귀부인’.

    보고도 좀처럼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이벨린은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제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걸’. 강조해 발음하는 이벨린의 목소리에 미세한 날이 섰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바섬 백작 부인, 이사벨라는 고운 눈매를 살짝 접었다. 이벨린의 당혹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짐작 가는 바가 없다는 척.

    “뭐가 문제죠?”

    이사벨라는 여유롭게 찻잔 너머로 이벨린을 마주했다. 이벨린은 눈매를 좁힌 채 그 가증을 마주했다. 점점 더 날이 서기 시작한 분위기에, 곁에 선 아멜리아가 도리어 초조한 낯을 했다.

    아멜리아는 더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할게요. 황태자 전하께서 곧 찾으실 터라…. 이벨린, 저녁에 다시 보러 올게요. 나눌 말이 있어요.”

    아멜리아가 서둘러 문을 닫고 나서고도 한참 동안이나 그들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벨린은 헛웃음을 삼키며 이사벨라와 ‘귀부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이사벨라가 살짝 웃으며 찻잔을 소서에 내려놓았다.

    “아, 그래. 둘이 구면이죠? 브리타냐에서 카밀라가 내 명령으로 당신을 찾아갔을 때, 그때 인사를 나누었겠어.”

    “도대체 어떤 사이예요?”

    “내가 처녀 적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이에요. 오랜 친우고…. 폰페라다 궁에 심을 사람으로 당신을 추천해 준 게 바로 카밀라예요.”

    카밀라, 비센테, 아멜리아…. 열이 오르지 않았다면 상황을 좀 더 명료하게 파악했을 텐데, 지금은 판단이 어려웠다.

    “처음부터, 이럴 목적이었나요?”

    이제 갓 마흔 줄에 접어든 이사벨라의 얼굴은 한 아이를 성인 직전까지 키워 냈다기엔 여전히 어리고 고와 보였다. 그녀의 질문에 엷은 웃음을 짓고 있던 이사벨라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말갛던 얼굴은 고작 입매를 내리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스산하고, 나이 들어 보였다.

    “아니.”

    “…….”

    “처음에는 너도, 2황자도 죽일 목적이었지.”

    치레 삼아 한 겹 덮어 두었던 예의가 벗겨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여태 웃고, 떠들고, 교태롭게 굴던 것이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이사벨라는 공허해 보였다. 남은 것은 그저 겉껍질뿐이고, 영혼은 처음부터 어디에도 없었던 양.

    이벨린은 그녀의 텅 빈 눈을 흔들림 없이 마주했다.

    “죽일 목적이었다면, 지금은 달라졌다는 뜻일까요?”

    그래 봐야 여전한 잠옷 차림에다가 어깨엔 푹신한 숄이나 덮고 있는 하찮고 되바라진 꼴이겠지만…. 이벨린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그제야 인지한 듯, 이사벨라의 입매가 조금 부드럽게 이완되었다.

    “…그래. 지금은 달라졌지.”

    “왜죠?”

    “2황자께서 외국인 시종을 요구했을 때 황후께선 그 기회를 적극 이용하고 싶어하셨어. 에스페다인들은 2황자를 사랑하다 못해 숭배했고, 그런 남자를 반역 혐의로 옭아매려면 보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니까.”

    “…….”

    “폰페라다 궁에는 온갖 세력에서 보낸 첩자들이 들끓었지만, 2황자께선 철저해서 좀처럼 고꾸라지는 법이 없었거든…. 그리고 그때 마침 카밀라가 네 책을 인상 깊게 읽었지. 널 추천한 건 카밀라지만, 결국 널 폰페라다 궁에 밀어 넣을 첩자로 뽑은 건 나였단다.”

    카밀라의 언급에, 이사벨라의 뒤에 서 있던 ‘귀부인’이 입매를 끌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벨린은 조금 매서워진 눈으로 그 얼굴을 기억에 담았다.

    어쩐지 에스페다 주류 사교계에서 본 적이 없다 싶었더니, 처음부터 바섬 백작 부인이 개인적으로 부리는 하녀였을 줄이야….

    “저번에도 말했잖니. 난, 처음부터 네가 아주 재미있었다고.”

    “…….”

    “의아하게 생각한 적 없니? 네게 주어지는 ‘의뢰’들이 어느 순간부터 단순해진 것에 대해….”

    과거를 되짚는 이벨린의 표정이 다소 흐려졌다.

    이사벨라의 말대로였다. 마리아의 죽음, 그리고 3황자의 죽음과 맞물린 시기부터 급격하게 ‘귀부인’으로부터의 접촉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때는, 그저 비센테가 궁 내부 첩자 정리를 잘했으리라고 생각하고 안일하게 넘어갔던 것인데.

    ‘그즈음부터 이사벨라를 포섭했구나. 이사벨라가 내 배후였다는 걸 그가 알고서 했든, 모르고서 했든….’

    이사벨라가 손짓하자, 카밀라가 차갑게 식은 찻잔과 찻주전자를 쟁반에 챙겨 들고 물러섰다. 이벨린은 그녀가 아주 문을 닫고 나서기까지 기다렸다가 다시금 이사벨라를 마주했다.

    “그러면 대체 무엇 때문에 마음을 바꾸신 거죠?”

    “2황자의 적이 나의 적이 되었으니까.”

    지극히 우아한 어조였다. 약점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동질감을 이끌어 내는 이사벨라의 화법은 사교계 처세술의 정점이었다. 주의하지 않으면 그대로 믿게끔 사람을 유도한다. 하지만 고작 말 몇 마디로는 부족했다. 이벨린에게는 조금 더 명확한 확신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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