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 추방을 받도록 최선을 다하고, 만약 사형이 내려지게 되면 가지고 있는 재물로 병사들을 매수하는 수밖에 없어.’
그녀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힘이 풀린 회푸른 눈동자가 느릿하게 병사들의 면면을 훑었다. 저 사람은 너무 완고하고, 저 사람은 돈이라면 제 손이라도 잘라 팔 거고, 저 사람은 도박 빚이 있고….
며칠 동안 대화를 엿들은 보람이 있게 얼추 매수될 만한 자들이 보였다.
‘일단 두 명, 아니 확실하게 셋으로 가자. 만약 ‘이벨린’이 깨어나게 된다면 공동묘지로 옮겨지는 도중일 테니까…. 총이 아니라 독으로 죽고 싶다고 법관에게 돈을 좀 찔러 주면 돼. 혹시 모르니, 장기가 크게 손상되지 않는 독을 구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불길한 종소리는 정확히 여섯 번을 울리고 소리가 멎었다. 곧 동이 튼다는 신호였다.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지점이 도래했다고, 무덤덤하게 생각했을 때였다. 지하 감옥으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말씀하셨던 포블라 건은 명령대로 처리했습니다.”
비센테가 테이블에 긴 다리를 포개 앉자마자 공손한 보고가 시작되었다. 수도에 입성하자마자 쉴 틈도 없이 조부의 추도식을 주관한 직후였다. 그의 표정에선 황량한 기색이 뚝뚝 묻어났다.
날이 선 눈매에 성에처럼 자리 잡아, 인간이라기보다는 우아한 피로를 조각해 둔 상처럼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도 면구하지만, 오늘까지는 쉬시는 것도….”
“괜찮으니 계속하지.”
그가 오른쪽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턱을 괴자, 긴 손가락이 눈의 끄트머리에 닿았다.
“발타자르에서 오기로 한 연락은?”
“제대로 수령했다고 하더군요. 검역을 통과한 것까지 우리 측 인사가 확인했습니다.”
엔리케는 말을 멈추고 목에 낀 가래를 가다듬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큼, 흠… 죄송합니다. 언론 작업은 이미 끝났습니다. 전하께서 고작 한 달 만에 이룩한 업적에 대해서부터 떠들기 시작할 겁니다. 우리가 일부러 교정해 줄 필요도 없죠. 전선에 도착하신 지 열이레 만에 이슬라 고원까지 점령하셨으니.”
“…….”
“그 땅을 빌미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경제적, 지리적 이점을 확보했는지만 서술해도, 뭐, 충분히 열광해 댈 겁니다. 동시에 거리엔 노동자들의 벽보가 붙겠죠.”
“…….”
“황태자의 측근이 제집에서 부리던 하녀를 강간하고 죽인 것과 방직 공장에서 깔려 죽은 열두 살짜리 아이에 대한 이야기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불행이 실릴 겁니다. 현 황태자의 사람들로 인해 일자리와 생을 뺏긴 사람들의 이야기들을요.”
“…….”
“그리고 그런 여론이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 의회에서 연합당 의원 셋과 무소속 의원 둘이 전하의 정당성을 주장할 겁니다.”
“…….”
“본래 황위가 누구의 것이었는지, 누구에게 돌아가야 마땅한지.”
바라 마지않던 복수의 끝, 혹은 목표의 끝을 목전에 두고서도 비센테의 표정은 한없이 고요했다.
“황제께 총을 쏘았다던 레폴리까노(공화주의자)는. 확보했나?”
“예. 황태자가 배후라는 증언도 확보해 두었습니다.”
“던져 줘. 앞으로 물어뜯을 거리가 많이 필요할 테니까.”
황제는 제게 총을 쏜 장자를 좌시하지 않을 테고, 결국 그 수순으로 비센테의 정당성을 마지못해 인정할 터였다. 그를 죽이려 든 제 아들보다, 한결같이 충성을 바쳤던 조카가 더 믿을 만하다는 바섬 부인의 속삭임대로.
애첩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는 것에만 급급해, 평생에 걸쳐 그 조카를 경계해 왔다는 것도 잊고.
그렇게 황제가 제 장자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동안, 그의 기사들이 각 지방의 주요 거점들부터 조용히 점령할 것이다. 가도를 지켜야 하는 병사들은 자리를 비울 것이고, 성주들은 조용히 문을 열고, 카스트로 휘하의 기사단은 영문도 모른 채 습격당할 것이다.
명령과 연락 체계가 어그러진 틈을 타 노동자들은 집결하고, 불씨가 되어 황제의 퇴진을 외칠 것이다.
“하나 수상한 점은 황태자의 움직임이 묘하게 고요합니다. 물밑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기보다는… 사실, 적잖이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더군요.”
“…….”
“어제만 해도 황후께서 온 궁을 뒤집으셨고, 오후엔 비탈리 영애가 황태자의 궁에서 울면서 뛰쳐나왔다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우리 예측보다도 더 내부적인 균열이 생긴 모양입니다.”
“그 여자 때문에?”
“예. 그 여자 때문에.”
그는 피로한 시선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몇 가지의 계산적인 심상부터 치솟은 것은 본능이었고, 그 끝이 자꾸만 무뎌지는 것은 불유쾌한 미련이었다. 쓸모도 없어 잘라 내야만 하는 욕심, 본능, 혹은 해괴한 애정…. 어떤 단어를 가져다 붙여도 상대가 엘레나가 아닌 이상 정당화될 수조차 없는.
모든 복수가 다 끝난 뒤에도, 삶을 이어 가고 싶게끔 만드는 생의 불티.
그는 이제 눈을 감고도 여자의 모든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저를 볼 때마다 잘게 흔들리는 청회색 눈동자, 발간 귓가, 도톰한 입술과 엷은 체온…. 한 손만으로도 쉽게 꺾일 여린 체구에 깃든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는 의지.
엘레나를, 닮은.
여자에게서 엘레나의 흔적을 하나, 둘 찾아낼 때마다 그는 바닥으로 처박히듯 가라앉았다. 염치도 무엇도 없이, 홀린 듯 엘레나의 자국을 좇으면서, 닮은 것만으로도 애달파 주제도 모르고 보호하기에나 바빠서….
내려앉는 숨이 묵직했다.
“그 여자는… 어떻게 하고 있지?”
“재판 전 사람을 보내 탈출을 도왔습니다. 비탈리 가문에서 배심원단을 적잖은 돈으로 매수한 듯하더군요. 황태자께서 역정을 내셔도 황후께서도 비호하시니, 재판을 잘 받아 봐야 노역형이나 사형일 겁니다.”
엔리케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마도… 지금쯤 옮겼겠군요. 말씀하셨던 대로, 소동이 가라앉으면 곧장 브리타냐행 배에 승선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저게 그 여자가 정리했던 문서인가?”
비센테가 턱 끝으로 책상에 얹어져 있던 서류 더미를 가리켰다.
“아, 예. 맞습니다.”
엔리케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들을 갈무리했다. 시간이 제법 흐른 듯 변색된 종이와 얼마 전에 작성된 깨끗한 종이가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였다. 엔리케는 테이블 위로 상체를 기울여 몇 가지를 손으로 짚어 냈다.
“전하께서 의심하셨듯… 필체가 다소 다른 부분이 보입니다.”
“…….”
“여기 이 획을 보시면 이렇게 둥글게 쓰여 있지만, 폰페라다 성에서 했던 필사는….”
엔리케는 차마 말을 더 잊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무심한 듯 서류들 위를 배회하던 비센테의 눈매가 어느 순간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좀처럼 제가 본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종이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류가 쌓인 책상으로 걸어가는 기색이 흉흉했다. 비센테는 제 손으로 정돈된 서류의 가장 윗부분부터 차분히 헤집었다. 한 장, 또 한 장.
“이걸… 이벨린이 작성했다고?”
“어떤 정보들은 시간이 급해서…. 개중 이보다 더 알아보기 힘든 것은 오른쪽에 두었습니다.”
“…….”
“이건 무심코 서명을 하다 멈춘 듯한데, 혹시 찾으시는 게, 이런 것인지….”
심상찮은 기색에 엔리케가 가장자리가 불에 그을린 종이를 내밀었다. 운이 좋게 벽난로에서 절반만 탄 것을 발견해 따로 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종이를 받아드는 비센테의 손이 움찔 떨렸다. 마치 그게 종이가 아닌, 불씨라도 되는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