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나 애처롭다니. 네가 그 남자의 마지막을 못 본 것이 아쉬워.”
말로나마 갖추었던 예의가 벗겨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이벨린의 절박한 민낯에 파르티다가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그 남자는 네 안위만을 걱정했어. 그 독을 마시는 그 순간까지도. 고작해야 평민 계집애에겐 한없이 아깝기만 한 마음이지.”
“…….”
“덕분에 대사를 매수하는 일도 쉬웠어. 이렇게 말해 주는 건 네가 여기서 무슨 말을 듣고, 누구에게 뭐라고 지껄여도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
이벨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가, 다음 순간 환하게 웃었다. 기어이 터져 버린 눈물이 양 뺨을 흠뻑 적셨다.
그 기괴한 낯짝에 파르디타의 말문이 드물게 막힌 순간이었다.
“고마워요.”
고맙다니. 파르디타의 눈매가 미친 여자를 보듯 구겨지려는 찰나였다. 테이블 너머로 뻗어 온 이벨린의 손이, 절박하게 파르디타의 손을 붙잡았다. 목이 잔뜩 멘 채로, 꺽꺽거리며.
“당신이 인정해 줘서, 당신이 사주한 거라서.”
“…….”
“그걸 숨기지 않고 말해 줘서….”
카터의 죽음 이후로 이벨린을 가장 몰아붙인 것은, 그 죽음에 비센테나 엔리케가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었다.
근래의 ‘이벨린’이 가지는 첩자로서의 가치는 그들에게 상상 이상이었을 테고, ‘레녹스 백작 영애’의 이름값을 유지하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뿐이었다.
카터를 회유하거나, 그를 죽이거나.
그래서 정말로 그가 죽었다는 걸 알았을 때 이벨린은 제 등 뒤를 가장 먼저 의심했다.
맹목적으로 쫓던 주인을 문득 의심하는 개가 된 기분이었다. 깜깜한 밤중에 불빛도 없이 버려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니라니….
“그가 날 모른다고 했던 건, 파르디타. 내게 정리할 시간을 주려던 거였어요. 그의 계획대로라면 나는 내일 브리타냐로 떠났어야 했거든요.”
“…무슨.”
“내가 이걸 말해 주는 건… 당신이 아주 아깝게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예요. 당신이 얼마나, 잔인한지… 그게 내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알려 주기 위해서.”
“…….”
“고맙다는 건 정말 진심이에요.”
내가 내 선택을 의심하지 않게 해 주어서, 비센테를 위해 결심했던 모든 것들을 후회하지 않게 해 주어서.
이 죄악감과 미안함은 오롯이 혼자서 간직할 수 있게 해 주어서.
“언니.”
“파르디타. 깜짝 놀랐잖아.”
“이 화관, 언니 줄게.”
“…손 좀 봐. 네가 직접 만든 거야?”
“언니는 오라버니의 비가 될 테니까. 그러면 내 가족이잖아.”
그렇게 웃던 너를, 이제는 정말로 버릴 수 있게 해 주어서.
***
브리타냐의 대사로부터 ‘이벨린 로즈 레녹스’를 모른다는 답신이 도착한 이래로, 이벨린의 처우는 보다 더 끔찍해졌다. 귀족의 품위나마 지켜 주던 첫 감옥에서 쫓겨나, 지하 감옥으로 내팽개치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조사관들의 신문은 날이 갈수록 험악해졌고, 음식은 마른 빵에 물이나 제때 나오면 다행이었다. 벽에 등을 기댈 때마다 뼛속까지 스며든 냉기로 온몸이 떨렸다. 이 와중에 모포나 겉옷은 단 한 장도 지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끌려온 날 입었던 잠옷 차림 그대로였다.
이쯤 되면 안 그래도 부실한 몸더러 제발 좀 아파 주십사 기원하는 꼴이었다.
이벨린은 밭은기침을 몇 번 내뱉고는, 열이 오르는 몸을 추슬렀다. 잔뜩 연약해진 몸은 조금만 움직여도 두개골이 징징 울렸다. 이벨린은 무릎으로 겨우 기어서 쇠창살에 뺨을 기댔다. 서늘한 쇠기둥이 뜨거워진 몸에 얼마간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지친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최근 벨몬테는 연일 그녀에 대한 소문으로 시끄러웠다. 그 악독한 레녹스 백작 영애, 희대의 사기꾼, 황실마저 감쪽같이 속인, 상류층에게 보란 듯이 한 방 먹인….
이젠 그녀가 카터 에일레이 윈스포드를 죽였느냐, 죽이지 않았느냐는 부수적인 문제였다.
손에서 힘을 풀자,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신문이 펼쳐진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황태후 폐하의 공허한 마음을 파고든 사기꾼! 교활한 이벨린
이벨린은 흐릿한 눈으로 신문을 마저 바라보다 픽 웃었다. 조사관들에게서 얻어 낸 몇 개의 신문을 보면, 엔리케가 꽤 잘 대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루카스와 단테가 몇 번인가 면회를 신청했지만, 그녀는 전부 거절했다. 그들에게 한 점의 오점도 남겨서는 안 되었으니까. 이 희대의 사기극은 오로지 그녀 혼자서 꾸민 일로 막을 내려야 했다.
이제 곧 동이 트면 그녀의 재판이 시작된다. 그러면 제게 씌워진 모든 혐의를 순순히 인정할 작정이었다. 어차피 그녀가 목적했던 대부분은 전부 이뤄 냈다.
카스트로가 가진 자료들을 대부분 빼돌렸고, 비센테의 계획은 조금 더 완전해졌고, 코라에겐 그녀가 얻어 낸 재산을 남겨 주고…. 유연히 흘러가던 생각이 잠시 머뭇거렸다.
‘몸이 크게 다치지 않을 방법을 찾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벨린’이 다시 이 몸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습관처럼 제 목을 더듬었다. 힐다가 전해 주었던 목걸이를 찾아 손에 꽉 쥐었다.
‘너무 긍정적인 추측이지만, 이걸 마시면… ‘이벨린’이 돌아오는 걸까?’
만약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적기가 아니었다. 이건 뒤처리만 남기고 도망가는 꼴이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마법이나 저주, 요행 같은 뜬금없는 것들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정확한 도움이었다. 황궁의 바깥에서 접근하는 사람들이나, 비센테와 연루된 사람들이 아니라….
그런 자들은 등 뒤에 감시의 시선을 줄줄이 매달고 있을 테니까.
‘물론, 재판을 받는다고 꼭 사형도 아니야. 순순히만 굴면 국외 추방으로 끝날 거야. 최악의 경우라고 해도 브리타냐로 압송되는 것에서 그칠 테고….’
버릇처럼 최악에서도 차악을 떠올렸지만, 솔직히 희망을 자신하긴 어려웠다. 파르디타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을 때에나 상식이 통하겠지…. 그녀의 재판이 비탈리의 후원을 받은 법관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부당한 선고가 내려질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이젠, ‘이벨린’을 위한 대비를 해두어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