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51)

“영애의 신분이 확실하다면 그런 것을 걱정하실 이유가….”

“모종의 정치적 거래로 인해 그분께서 저를 부정하셔야만 할 이유가 있다면요?”

“굳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까요?”

“감사관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겐 적이 많으니까요. 최근 시끄러웠던 것을 아실 거예요. 세간은 제가 감히 에스페다의 황태자를 노린다고 생각하고, 그게 꽤 주제넘는 욕심이라고 욕을 퍼붓죠.”

“…….”

“평민들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같은 귀족들 중에 그런 불경한 마음을 품을 자가 없을까요? 차기 황후가 ‘우리 가문’에서 나올지도 모르는데.”

“…….”

“저 눈엣가시 같은 계집만, 없어진다면.”

신랄한 어조였다. 제가 아닌 다른 자를 일컫는 것처럼 이벨린의 목소리와 눈매에 날이 섰다.

“…….”

무언가를 생각하듯 흐려졌던 감사관의 시선이 다시금 또렷해졌다. 그녀의 말에 반쯤 홀리듯 설득되었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긴 하지만… 저희로서는 원칙이 중요합니다. 영애께서 완고하시고, 증인은 이대로는 신뢰할 수 없다고 하시니… 모든 조사는 대사께 회신을 받은 뒤로 미루어야 하겠군요.”

“…….”

“오늘은 이만 여기서 마치도록 하죠. 날이 밝는 대로 회신이 오면….”

그녀의 등 뒤에서 문이 전조도 없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감사관도, 관료도 예상하지 못한 등장인 듯 화들짝 놀라는 얼빠진 얼굴이 보였다. 이벨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정면만을 응시했다.

“제가 방해했나요?”

예상했던 고운 목소리가 낭랑하게 석조 벽을 울렸다. 파르디타였다. 이벨린에게는 제법 단호하게 대처했던 감사관의 얼굴에 명확한 당혹이 어렸다. 그가 양손을 저으며 대꾸했다.

“다, 당치 않습니다.”

“제가 긴히 레녹스 양과 나눌 말이 있어서요. 두 분, 괜찮으시다면 자리를 좀 비켜 주세요.”

“그건 안 됩니다. 레녹스 백작 영애께선 지금 살해 사건의 용의자십니다. 두 분만 독대하시는 것은 위험….”

“독살이라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구구절절 늘어지기 시작한 감사관의 말을 파르디타가 툭 끊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파르디타의 뱀처럼 가늘어진 눈매가 훤히 그려졌다. 감사관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습니다만….”

“그러면 괜찮겠네요. 영애께서 지금 독을 지니고 계실 리도 없고, 영애가 권하는 것을 제가 먹을 리도 없으니까요.”

“…….”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거의 부탁하는 어조였다. 감사관은 곤란한 듯 뒷머리를 긁더니, 잠시 침묵했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제 안위와 원칙 그리고 권력 사이에서 치열한 조율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금방 끝내셔야 합니다.”

“물론이에요.”

이윽고 감사관과 관료가 문을 닫고 나가자 한동안 정적만 맴돌았다. 코끝에 맡아질 리 없는 시큰한 향이 맴도는 듯했다. 파르디타가, 제 뒤에 있는 것만으로도.

파르디타는 천천히 걸어 이벨린의 맞은편에 앉았다. 턱을 괴고, 다리를 꼬고, 발끝으로 이벨린을 건드렸다.

“이벨린.”

고집스럽게 테이블을 향하던 시선을 들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파르디타가 꿀처럼 달콤하게 웃었다.

“꼴 좋게 됐어요, 그렇죠? 살해 혐의라니….”

이벨린이 요란하게 끌려온 것이 반나절 전이었으니, 아마도 관련 소식이 수도를 한 바퀴 돌고도 남았을 터였다. 지금쯤이면 파르디타가 득달같이 달려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면서, 정작 진짜로 목도하게 된 피로감은 지나치게 무거웠다.

이벨린에게 조롱을 퍼부을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도 능력이라면, 온 에스페다를 뒤져도 파르디타를 따라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비탈리다. 기사들이 쩔쩔매며 물러서는 것이 당연했다. 바섬에게 군권의 절반을 주었다고 한들,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비탈리의 손에 있었으니까.

황제가 요 근래 비탈리를 박대한다는 소문이 돌아도 그들이 세운 왕국은 견고했다. 비탈리는 여전히 황후의 가문이었고, 황제의 장자의 가문이었다.

바섬 백작 부인이 아무리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한다고 해도 번듯한 후계조차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노련한 에스페다의 귀족들이 충성을 맹세할 상대는 여전히 카스트로 하나뿐이었다.

물밑에서야 다를지 몰라도….

이벨린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파르디타를 응시했다. 호시탐탐 그녀를 물어뜯을 기회만 노리는 짐승 앞에서 상처를 감추려는 것처럼. 파르디타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졌다.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나요?”

파르디타가 잔인한 만족을 느끼게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았지만, 벌써부터 지치는 기분이었다. 굳이 이 여자가 아니어도 이벨린은 지금 지나치게 여유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궁지에 몰린 것 같은 감정을 가까스로 삼키는 것뿐이었다.

파르디타는 마치 그 속이 전부 들여다보이는 것처럼 웃었다. 웃음에 유쾌가 묻어났다.

“재밌잖아요. 제가 신경 써서 제안한 것들을 모조리 물리시더니, 멀리 가지도 못하고 고꾸라진 게.”

“…….”

“고작 이렇게 무너질 것을 아등바등.”

이벨린은 파르디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눈을 내리떴다. 테이블의 지저분한 흔적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저 여자가 원하는 게 그녀의 고통이라면, 반응해 주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들리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척. 제풀에 지쳐서 나가떨어지도록.

“그러게 현명하게 행동했으면 다 괜찮았을 텐데.”

“…….”

“내가 너 같은 계집을 용인할 수 있었을 때.”

“…….”

“자주 얼굴이 마주칠 수 있는 곳에 있어도, 그러니까 카스트로의 곁에 두어도 괜찮겠다고,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이벨린은 그제야 해쓱한 뺨을 들었다.

“이번 일… 당신이 한 거예요?”

파르디타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어떨까요?”

“…….”

“만약 그렇다고 해도 영애께서 이제 와서 뭘 어쩌시겠어요? 손발이 다 잘려 나간 인형 주제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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