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51)
  • “내용에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군인이 사무적인 어조로 되물었다.

    “카터… 에일레이 윈스포드 자작이….”

    목소리가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이벨린은 침착하게 스스로의 상태를 살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가? 아니었다. 발작의 전조가 있나?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를 이루는 모든 감각들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군인의 말만큼은 도저히 제대로 인지하기 힘들었다. 그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발악에 더 가까웠다.

    “그가, 그러니까….”

    그녀는 금치산자라도 된 것처럼 같은 말이나 반복했다. 스스로도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 이벨린은 눈을 깜박였다. 그러기 무섭게 고여 있는 줄도 몰랐던 눈물이 뺨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그녀는 얼떨떨하게 손등으로 뺨을 더듬었다.

    제 육체의 반응과 머릿속의 둔중한 인식 사이의 괴리가 섬뜩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어 아득한 공포였다.

    “그가, 살해… 당했다고요?”

    “예.”

    그녀는 하마터면 장난치지 말라고, 헛웃음과 함께 그런 말이나 내뱉을 뻔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아니, 어쩌다….

    “자세한 상황은 감사관께서 설명하실 겁니다.”

    이벨린은 숨을 몰아쉬며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기이하게도.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면면이 아주 선명하게 인지되었다.

    몇몇은 그녀를 가증스럽게 쳐다보고 있었고, 몇몇은 무관심, 두어 명은 그녀를 동정하는 듯 흐린 얼굴이었다. 정작 그녀는 제게 몰아치는 감정이 슬픔인지, 절망인지, 혹은 그저 미안함인지, 제대로 인지조차 못 하겠는데.

    군인은 그녀가 한참 모자란 짐승이니 한 번은 넘어가 준다는 태도로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영애께선 이번 사건의 유력 용의자입니다. 조사를 위해 지금 당장 이동하셔야 합니다.”

    아. 절망에 찬 신음이 기어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의 죽음은 오로지 그녀가 에스페다로 왔기 때문이었다.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고 상체를 앞으로 수그리자, 군인들이 다가와 그녀의 양팔을 한쪽씩 붙잡았다.

    우악스러운 힘에 이끌려 침대 바깥으로 내려졌다. 그대로 목줄에 매인 짐승처럼 복도로, 계단으로 끌려갔다. 이벨린은 저항하지 않고 고개를 떨궜다. 애써 미뤄 두었던 현실감이 그제야 닥쳐들었다.

    카터가 죽었다. 그녀 때문에.

    무엇보다 아까운 죽음이었다.

    ***

    이벨린은 작은 창을 통해 해가 서서히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조사를 하겠다며 득달같이 끌고 온 것이 무색하게 그녀는 방치되었다. 감옥은 좁았고, 허름했으나 서쪽 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굳건히 닫혀 있던 철창의 문이 열린 것은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군인들이 그녀를 끌어내 좀 더 작은 방으로 옮겼다.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고, 반대편엔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 뒤로는 사람들이 여럿 더 있었다. 군인들은 안에 있는 사람을 향해 경례를 올려붙이고 그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벨린 로즈 레녹스 백작 영애.”

    “네.”

    “앉으시죠.”

    감사관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로, 그녀에게 고개를 까닥여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그녀는 제 발로 걸어 의자에 앉았다. 유력 용의자라면서 끌고 온 것치고는 참고인 조사에 가까워 보였다.

    “브리타냐 측 대사께 급보를 보냈습니다. 그분이 영애의 신분을 증명하면 지금보다는 더 처우가 개선될 겁니다.”

    “카터 에일레이 윈스포드 자작께선… 어떻게 돌아가셨나요?”

    그렇게 묻는 입술은 제 것이 아닌 양 딱딱하게 느껴졌다. 감사관은 의미 모를 눈으로 이벨린을 바라보았다.

    “음독입니다.”

    “독의 종류는요.”

    “조사는 제가 진행합니다, 영애.”

    이벨린은 고집스럽게 제 무릎을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감시관을 바라보았다. 발아래 도사린 공포와 죄악감으로부터 도망치듯.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

    카터의 죽음이 가장 끔찍한 것은 그 원인이 그녀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눈을 감아도, 감지 않아도 폭우처럼 카터에 대한 ‘이벨린’의 기억이 쏟아졌다.

    잊어서는 안 된다는 듯, 그녀만은 그를 기억해야만 한다는 듯, 누구보다도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는 듯….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순식간에 흠뻑 젖어 들었다.

    이 원망은 아마도 ‘이벨린’의 것일 터였다. 그녀의 몸을 제 것인 양 차지한 뻔뻔한 계집을 향한 원망을, 일이 이렇게 어그러지고 나서야 슬쩍 내뱉는 것이다. 미련하고, 착하고, 악독한 ‘엘레나’에겐 비할 바도 못 되게 순수해서…. 그게 못내 서글펐다.

    “뭐든….”

    이벨린이 꽉 메인 목을 가다듬자, 남자가 유리컵에 물을 따라 밀어 주었다. 그녀는 잔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로 감사관을 응시했다.

    “뭐든 물어보세요.”

    “사건이 발생한 날 오전 외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목적이었습니까?”

    “저는 그날 집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요.”

    “증언을 확보했습니다. 오후 2시경 피사로 거리를 걷고 계신 것을 목격한 자가 있습니다. 누군가와 접촉한 후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봤다고 하더군요.”

    “저는 아니에요. 아마도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 중 한 명이었나 보죠.”

    “당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우습군요. 길거리의 꼬마가요?”

    “최근 워낙 여러모로 유명하셨지 않습니까.”

    신문에서. 감사관이 흐리게 덧붙인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만으로 충분했다. 이벨린은 그의 집요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되돌려 주었다.

    “길거리 뜨내기의 말을 제 말보다 무겁게 믿으실 줄은 몰랐어요.”

    “아,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영애의 신분에 대해서 사소한 확인이 진행 중입니다. 브리타냐 대사께서 노환으로 근래 변경되셨다는 것을 아실는지….”

    “그게 저와는 무슨 상관이죠?”

    “새로 오신 대사께서 영애의 신분에 대해 사소한 의문을 품으셨습니다. 그분께서 영애를 직접 확인하고 나면 모든 처우가 개선될 겁니다.”

    이벨린은 픽 웃음을 물었다.

    “우습군요.”

    감사관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멈칫하자, 그 뒤에서 무언가를 기록하던 관료 한 명도 같이 얼어붙었다. 감사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슨 뜻입니까?”

    “만약 대사께서 저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면, 타고난 제 신분이 없던 것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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