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51)
  • “…무슨.”

    “목소리도 내지 말고요. 의심스럽겠지만, 제발 내 말대로 해요.”

    레베카의 어조는 단호했다. 그녀는 아주 공포스러운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처럼 절박해 보였다. 불현듯 조바심이 치솟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누가 미행이라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주 끔찍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

    ‘루카스나 단테와 동행했어야 했나? 움직이는 사람이 많으면 아무래도 이목을 끌기 좋으니까 혼자 온 건데….’

    레베카는 마치 이 골목이 아주 익숙한 사람처럼 인파를 요리조리 피해 누볐다. 그녀의 팔을 단단히 붙든 채 어느 골목의 모퉁이를 돌자, 허름한 짐마차 한 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주위를 살핀 레베카가 재빨리 마차의 문을 열고 이벨린을 짐칸으로 떠밀었다.

    “가요.”

    “어디, 어디를요?”

    얼떨결에 올라타자 곧장 문이 닫혔다. 이벨린은 측면에 난 창을 바로 열었다. 곧장 레베카가 창문이 바짝 붙어서며 속삭였다.

    “잘 들어요, 이벨린. 당신 지금 아주 지독한 사건에 휘말렸어요.”

    “사건이라뇨? 대체, 무슨….”

    “일단 가장 빠른 길로 저택으로 돌아가요.”

    불안감으로 파리하게 질린 얼굴이 섬뜩했다.

    “돌아가서 잠옷이든 뭐든 실내 옷으로 갈아입고 믿을 만한 하녀를 시켜서 문 앞을 지키게 해요. 아파서 내내 집에만 있었다고요. 그렇게 해도 그게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당신은 오늘 이 장소엔 오지 않았던 거예요. 이제 출발해요!”

    마지막 말은 마부를 향한 외침이었다. 레베카가 창문을 닫으며 짐칸을 두드리자, 마부가 급하게 마차를 출발시켰다.

    ***

    “메리.”

    허겁지겁 마차에서 내린 이벨린은 쪽문 앞에서 조용히 메리를 불렀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빨리 돌아왔기 때문일까? 메리는커녕 주변을 오가는 하녀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벨린은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자들의 이목이 정문 쪽에 쏠려 있긴 하지만 여기서 시간을 오래 지체하면 발각당할 위험이 컸다.

    “메리!”

    이벨린은 목소리를 조금 더 돋웠다.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고 담을 넘을 방법을 찾아보려던 찰나였다. 쪽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가씨?”

    메리였다. 이벨린은 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열어드릴게요.”

    메리가 빗장을 풀어내리는 동안 이벨린은 초조하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메리는 이벨린이 들어오기 쉽도록 한쪽으로 비켜섰다. 이벨린은 고개부터 들이밀곤 내부 동태를 살폈다.

    “별일 없었지?”

    “별일이야 당연히 없죠. 나가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이렇게 땀범벅이 다 되셔선….”

    “나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어.”

    이벨린은 서둘러 뒤뜰을 가로질렀다. 하인들이 드나드는 부엌문을 통해 저택의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를 내달리듯 걸으며 모자를 벗고, 소맷부리의 단추를 풀어냈다.

    아멜리아의 조급함이 제게도 옮겨 온 게 틀림없었다.

    아멜리아가 적군인지, 아군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녀에게 불리한 정황을 뒤집어 씌우려고 했다면 굳이 위험을 경고해 주지 않았을 터였다. 짐마차까지 준비해 가며, 그것도 집으로 돌아가라니.

    “뜨거운 물수건이랑 비상약을 좀 준비해 줘. 쓰던 것도 관계없어.”

    “잠시만 기다리세요.”

    메리가 부엌에 갔다 오는 동안, 이벨린은 서둘러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메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벨린이 말했던 것들을 모두 챙겨 들고 돌아왔다.

    이벨린은 물수건을 머리에 얹고, 쟁반은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만약에 누가 찾아오거든 아프다고 해. 앓아누워서 침대 밖으로는 나간 적도 없다고…. 오늘 내가 외출했던 걸 또 누가 알지?”

    “아마도 저나 루카스 님, 그리고 단테 님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숨 좀 고르세요. 마실 물도 좀 가져다드릴게요.”

    “고마워. 그러면 일단….”

    몇 가지 당부를 덧붙이려던 찰나에 바깥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이벨린과 메리는 서로를 마주 본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이벨린을 대신해, 메리가 창가의 커튼을 살짝 걷고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군인들이 찾아왔는데요?”

    “군인들?”

    “수도 경비대들인 것 같아요. 제가 나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올게요. 아가씨는 여기 가만히 계세요.”

    메리는 결연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곧 아래층에서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빠르게 가까워지는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시면 안 된다는 하녀들의 외침과 비명도 함께였다. 이벨린은 서둘러 물수건을 감추고, 뜨끈하게 달아오른 뺨을 베개에 묻었다.

    그러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고 군인들이 방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왔다.

    [이 악마 같은 놈들! 악당 놈들! 시엘라께서 대대손손 저주를 내리실 거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뒤이어 브리타냐어로 욕설을 내뱉는 메리가 웬 어린 군인의 손에 질질 끌려 들어왔다. 군인은 도저히 참아줄 수 없다는 듯 메리를 바닥으로 세게 내팽개쳤다. 메리는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나동그라졌고, 그 바람에 장식장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방금 전까지 팔팔하게 날뛰던 게 다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메리가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메리…!”

    이벨린은 놀라서 아픈 척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베개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에 새파란 불티가 튀었다. 이벨린은 저를 에워싼 군인들을 노려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무례죠?”

    “이벨린 로즈 레녹스 백작 영애 되십니까?”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테죠. 더는 내 사람 건드리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요.”

    “필수적인 절차에 따른 확인이니 양해하십시오.”

    “용건.”

    개중 가장 앞에 서 있던 군인의 노란 눈이 그녀를 잠시 응시했다. 그가 품속에서 돌돌 말린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럼, 전하겠습니다. 영애께서는 카터 에일레이 윈스포드 자작의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도주의 우려가 있어 긴급 체포 대상에 해당하며….”

    누가 머리 위로 얼음물을 들이부은 것만 같았다. 멍했다가, 얼얼했다가, 의심스러웠다가, 피마저 통하지 않는 것처럼 뒷머리가 저릿했다.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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