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담입니다, 농담. 그렇게 노려보지 마십시오. 무섭다고요.”
퍽이나 무서워하겠다. 이벨린은 코웃음을 치며 곁에 놓아둔 모자와 여행용 가방을 집어 들었다.
“어쨌든, 오늘은 이만 돌아가요. 선약이 있거든요.”
“선약이요? 아….”
뭔가를 짐작한 듯 엷게 탄식한 엔리케가 소곤거리며 덧붙였다.
“그자를 말하는 겁니까? 비탈리의 손을 탄….”
이벨린은 고개를 성의 없이 끄덕였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엔리케에겐 그녀가 처한 상황을 공유했는데, 용케 떠올린 모양이었다.
“맞아요. 설득이 된다면 좋겠지만요. 아니라면 정말 돌아가야 해요.”
엔리케의 입장에선 이제야 겨우 쓸 만해진 패를 아쉽게 잃은 셈이겠지만, 어차피 비센테가 마련해 준 배편도 출항일이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진 않았다. 이대로 카터와 돌아가는 것도 ‘이벨린’에게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내가 소멸하게 된다면, 아마도 원래 영혼이 이 몸으로 돌아올 테고.’
비센테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만은 아쉬웠지만, 조금이나마 그를 도울 수 있었던 기억은 큰 기쁨으로 남을 터였다. 게다가 엘레나의 몸을 되찾는다고 해도 그녀는 한 번 반역자로 죽었던 몸이었다.
일이 아주 잘 풀린다고 해도 공공연히 드러낼 수조차 없는 존재로나 남겠지. 죽어도 그의 곁에 나란히 설 수는 없을 것이다.
비센테의 결혼은 그의 황권을 공고히 만들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할 테니까….
이벨린은 쓴웃음을 삼켰다.
“아무튼, 오늘 대화를 나누어보면 가닥이 좀 잡힐 것 같아요. 아마 돌아가게 되겠지만요.”
그녀의 말에 엔리케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아주 잘 생각하셨습니다. 솔직히 그간 지켜보면서 좀 걱정되긴 했거든요.”
“걱정이요?”
“예. 괜히 얼굴 보면 심란하기만 할 거 아닙니까?”
“얼굴을 보다뇨?”
어딘지 모르게 대화가 자꾸 어긋났다.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에게 엔리케가 당혹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설마, 모르고 계셨습니까? 이… 시모라 인들이 득실대는 저택에서 지내시면서요?”
“대체 제가 뭘 모르고 있는데요?”
“시모라 백작께서 위중하십니다. 주치의 말로는 열흘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고 하더군요.”
“시, 시모라 백작께서요? 그, 그런 말은, 정말 전혀….”
“숨겼나 보군요. 황태후 전하의 명으로.”
“그렇다면, 그 말씀은.”
“북부 토벌이 속도전으로 치닫고 있다는 소리죠.”
이벨린은 제 표정을 감춰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엔리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센테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땐 소멸조차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진솔하다고 자신했던 믿음이 기만과 만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끔찍했다.
초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죽어도 초연해지지 못할 것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그녀는 떨리는 입술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말씀은, 곧….”
“예. 비센테 전하께서 며칠 내로 수도로 돌아오실 겁니다.”
카터가 편지를 보내온 것은 약속했던 일주일이 부쩍 다가온 시점이었다. 그는 한 번 통보한 것을 번복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설득의 여지도 없이 끌고 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먼저 대화를 요청한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미약한 희망을 느꼈다.
비센테가 떠난 직후 그녀는 더 바쁘게 움직였지만, 마음은 무기력했던 것 같다. 몸을 찾아도 좋고, 찾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때는 제가 당사자가 아니기라도 한 듯 멀거니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제법 간절해졌다.
고작, 그를 먼 발치에서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벨린은 며칠 새 야윈 손으로 허름한 원피스 자락과 모자를 매만졌다.
근래 시모라 저택 주변은 밤낮없이 가십을 쫓는 사람들이며 기자들이 득시글댔다. 다행스럽게도 신문에 묘사된 ‘이벨린 로즈 레녹스’의 인상착의는 검은 머리카락에 회색 눈동자였다. 덕분에 메리의 허름한 원피스를 빌려 입고 챙이 큰 모자를 쓰는 것만으로도 의심의 눈초리를 대부분 피할 수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마차는 귀족들의 사택이 우글대는 벨몬테의 신시가지를 지나, 몇 블록 떨어진 허름한 거리에서 멈춰 섰다. 이벨린은 마부에게 동화 다섯 개를 값으로 지불하고 짐마차에서 내려섰다.
저택에서부터 챙겨온 가죽 가방 안에는 패물 몇 개를 판 돈이 들어 있었다.
이런 것으로 카터를 설득할 수는 없겠지만, 빈손으로 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길을 따라 조금 걷자 허름한 임대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접선 장소를 이쪽으로 고른 것은 카터였다. 구시가지 쪽으로는 귀족들이 잘 다니지 않기 때문에, 몰래 만나기엔 적당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제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벨린은 걸음걸이를 조금 더 빨리 했다. 막 임대 저택의 경계석을 밟으려던 때였다.
뒤에서 빠르게 가까워지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여자였고,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사람이었다. 그 아래로 보이는 입매가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그녀를 향해 곧장 돌진해 온 사람이 다짜고짜 팔짱을 꼈다.
“맙소사! 이게 얼마 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무, 무슨…!”
이벨린이 반쯤 튀어나온 비명을 삼킬 수 있었던 건 그 목소리가 아주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이벨린은 반은 얼떨떨하고, 반은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상대를 살폈다. 때마침 여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기 때문에, 후드에 가려졌던 눈을 볼 수 있었다.
이벨린은 당혹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레.”
그녀가 말을 미처 다 뱉지 못했던 것은, 그 얼굴이 아주 익숙한 사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벨린’으로서는 죽어도 알 수 없는 얼굴이기도 했다.
레베카. 한때 아멜리아와 더불어, 그녀의 시녀였던 여자.
“그러게 내가 간다니까! 뭐하러 수고스럽게 여기까지 나왔어요?”
보고도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이벨린이 얼떨떨하게 얼어붙어 있자, 레베카가 눈을 부라리며 재촉했다.
“쉿. 아멜리아가 보냈어요. 일단 걸어요. 빨리.”
조금 전 살갑게 인사하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의 박력이었다. 이벨린은 레베카의 팔에 이끌려 애써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저택 앞에서 한 블록은 떨어진 뒤였다.
이벨린은 제 팔을 움켜쥔 레베카의 손을 붙잡았다.
“저, 대체 누구신데, 이러시지 마시고….”
이벨린이 몸을 살짝 뒤틀려고 하자, 레베카가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세게 힘을 실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뒤돌아보지 말고 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