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트로의 서재는 그녀의 기억 속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사소한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이벨린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쪽으로 다가섰다. 다른 건 다 달라졌어도 이 배치만 달라지지 않았다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이벨린의 하얀 손이 책등을 빠르게 더듬어갔다.
시작은 E부터였다.
***
빈틈없이 종이를 채워가던 손이 문득 멈췄다. 이벨린은 펜촉에 눌린 종이가 찢어지는 것도 모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겨 들었다.
아멜리아가 제게 속삭였던 순간, 이벨린은 그 얼굴에서 수많은 감정을 목격했다. 절망과 분노, 슬픔, 종내에는 그녀의 말이 거짓일 거라는 확신.
‘죽었을 리가 없다’라는 말은 다시 말하자면, ‘죽지 않은 모습을 알고 있다’는 뜻과도 같았다. 줄곧 했던 의심대로 황태자의 궁에 그녀의 몸이 보관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제법 멀쩡한 상태로.
어쨌든 지금은 낚싯대를 드리웠으니, 얌전히 기다려야 할 때였다. 이벨린은 한숨을 내쉬며 제가 쓰다 만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황태자 전하께 황후의 시녀가 정기적으로 약을 복용시키는 것 같…
짓눌린 펜촉 때문에 잉크가 엉망으로 번져 있었다. 이건 도저히 못 쓰겠네. 이벨린은 혀를 한 번 차고 종이를 구겨 바로 곁의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새 종이와 펜촉을 꺼내려는 찰나, 메리가 서재의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가씨. 손님께서 찾아오셨어요.”
“손님?”
“비야톨레드의 손님이요. 이쪽으로 모실까요?”
비야톨레드의 손님이라면 엔리케였다. 요 며칠간 바쁘다고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설마 무슨 좋지 못한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잠깐 생각에 잠겼던 이벨린은 서둘러 종이를 갈무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진하게 우린 차도 같이 준비해 줘.”
손수건으로 손날에 묻은 잉크를 닦고 있자니, 이윽고 엔리케가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헐렁하게 뒤집어쓰고 있는 후드 아래로 퀭한 눈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야말로 시체나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그가 고개를 까닥 숙이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얼굴을 뵙고 인사드리게 됐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일단 앉아요, 엔리케. 그런데 당신… 요즘 잠은 제대로 자요?”
“말도 마세요. 벌써 며칠째 철야 중입니다.”
그는 하품을 쩍쩍 해 대며 이벨린이 앉아 있던 책상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느긋한 태도에 이벨린은 긴장했던 마음을 조금쯤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끔찍한 사고가 터져서 찾아온 건 아닌 듯했다.
이벨린은 제가 먹고 있던 과자 몇 조각을 그의 앞에 밀어 주었다. 엔리케는 고맙게 받았다.
“아,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부터 한 끼도 안 먹었네요.”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어요? 여태 바쁘다고 비야톨레드 저택 밖으로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지금 아가씨께 온 수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잖습니까. 괜히 움직이시다가 기자들 이목이나 끌까 봐 제가 왔죠.”
때마침 메리가 차가 담긴 쟁반을 그들 사이에 놓아두고 총총히 사라졌다. 엔리케는 허겁지겁 들고 있던 과자를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찻잔을 끌어당겨 설탕과 크림을 들이부었다. 그가 찻숟가락으로 찻잔을 때리듯 요란하게 저으며 말했다.
“뭐, 상황이 상황이잖습니까. 겉으로만 보면 황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를 걷어차고 황태자를 잡은 꼴이니까요. 희대의 요부냐, 아니면 권력의 가련한 희생양이냐…. 의견 대립이 아주 팽팽한 모양이던데요.”
“…….”
“아, 둘 중 마음에 드는 쪽으로 골라잡아요. 원하는 걸로 내일 주간지의 첫 면을 장식하게 해 줄 테니까.”
“다 삼키고 얘기해요, 제발.”
이벨린은 다시금 지끈거리기 시작한 머리를 짚었다. 목이 막히는지 컥컥대던 엔리케는, 뜨거운 차로 목구멍을 꽉 틀어막은 과자를 녹였다. 이윽고 깨끗이 비워진 접시를 아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 나쁘게만 생각하진 말아요. 아가씨의 야망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던데.”
“그 반대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어제 제 마차로 썩은 토마토가 날아들었단 소린 못 들으셨어요?”
“들었습니다. 루카스 경이 단번에 제압했고요. 그 작자들을 풀어 주신 건 잘한 선택이에요. 여기서 더 평판이 나빠질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벨린은 초조하게 웃었다. 평판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카터와 약속한 일주일이 바로 내일이었고, 그녀는 아직 ‘몸’에 대한 실마리를 더 캐내지 못한 상태였다.
아멜리아는 그 뒤로, 정말 코빼기도 못 봤고….
만약 카터를 설득하는데 실패하면 정말 내일 당장 브리타냐행 배를 타야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엘레나’에게 남는 것은 완전한 소멸뿐이었다.
“이게 이번에 보내주기로 한 자료였나요? 읽어 봐도 됩니까?”
그녀가 마구잡이로 책을 쌓아 둔 책상을 흥미롭게 훑던 엔리케가 두툼한 서류 뭉치를 발견하고 물었다. 어차피 오늘 중으로 갈무리해서 넘겨줄 작정이었던 터라 이벨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 다 옮긴 건 아니지만… 한 번 확인해 보세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엔리케는 서류에 코를 박았다.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으로 빠르게 읽어 가기 시작하더니, 이벨린이 새로 따른 차 한 잔이 다 식어 갈 즈음 마지막 장을 넘겼다.
이윽고 긴 한숨과 함께 서류를 한 장씩 떼어 내 벽난로 속에 던져 넣었다. 오전 내내 고생한 자료들이 한낱 불쏘시개로 사라지는 모습에 속이 쓰렸지만, 다 외운 자료는 이렇게 태워야 뒤탈이 없었다.
서류가 재로 사라질 때까지 깊은 생각에 잠겼던 엔리케가 이윽고 고개를 들며 말했다.
“황태자가 그런 협약을 맺어왔다니… 프레스노 백작과의 유착 관계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도 이해가 가는군요.”
“이번에도 도움이 좀 되었을까요?”
“되다마다요. 여태껏 영애께서 확인해 준 정보 덕분에 정말 많은 것들이 수월해졌습니다. 비탈리 가문이 사병을 숨긴 위치를 벌써 몇 달째 추적했는데도 다 파악하진 못했었거든요. 하지만 영애 덕분에 다섯 곳 모두 찾아냈습니다.”
“다행이네요.”
“대체 이런 정보는 어떻게 얻어낸 겁니까?”
호기심이 가득한 엔리케의 물음에 이벨린은 그저 흐리게 웃었다.
안드라데 공작의 방문 시간에 맞춰 이벨린은 딱 두 번 카스트로 서재의 비밀 금고를 열었다. 금고의 암호 배열과 열쇠를 숨겨둔 위치가 2년 전과 달라지지 않아 가능했던 일이었다.
금고 안에는 익숙한 비밀문서들이 수북했다. 비탈리 가문에서 비밀리에 기르는 사병의 규모, 정치 자금 세탁을 위해 내세운 상단, 각종 단체들을 후원하며 맺은 계약서, 각 가문에 심은 첩자들의 인적 사항, 3황자의 죽음을 사주한 증거들….
그 모든 것을 확인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2년 전과 비교해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그때에 비해 좀 더 허술해진 것도 같았다.
‘2황자는 유폐당하고, 3황자는 죽일 예정이었으니 더는 뒷공작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그걸 전부 확인한 뒤로는, 이제 비밀 금고를 여는 모험을 시도할 필요도 없었다. ‘엘레나’이던 시절 외웠던 것을 그저 옮겨 적어 주기만 하면 되니까. 카스트로로부터 적당히 훔쳐낸 정보인 척하면서….
이벨린은 상념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항상 두세 번씩은 확인하세요. 제가 드린 정보가 맞는 정보인지, 아니면 가짜 정보인지는 저도 확신하기 어려우니까요.”
“적어도 지금까지는 모두 맞았습니다. 그나저나… 정말 세간의 평가대로 황태자 전하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건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