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151)
  • 심지어 제법 걱정해 주는 척하는 음성은 조금 애틋한 듯 들렸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드러난 어깨를 둥글게 문질렀다. 이벨린은 그 손길이 전혀 의식되지 않는 것처럼 웃었다.

    “아, 조금 쉬었더니 괜찮아졌어요.”

    “…….”

    “계속 서 있을 순 없으니, 차를 이곳에 준비해 달라고 할까요?”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묻자 카스트로가 코끝으로 웃었다.

    그들이 있는 ‘이곳’은 황태자의 집무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응접실이었다. 귀족이나 관리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대기할 때나 쓰는 장소이다 보니, 테이블도 없이 의자나 몇 개 놓여 있는 게 전부였다.

    “집무실로 옮기지. 순진한 척은 집어치우고.”

    “아, 그럴까요?”

    “내 집무실에 사사로이 드나들 수 있는 고위 귀족과 연줄이 닿고 싶다고 요청한 건 너 아니었나? 이제 와서 별….”

    “너무 속내를 드러내는 것보다는 이 편이 좀 더 나을 것 같아서요. 싫으셨어요?”

    “싫으면. 안 하게?”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문에 가깝게 다가서자 메리가 공손히 뒤로 물러섰다. 기어이 하녀를 대동한 것이 못내 짜증스럽다는 듯 쳐다본 카스트로가 집무실의 문을 제 손으로 벌컥 열었다.

    테이블 위에는 간단한 다과가 차려져 있었다. 몇 시간 전, 비릿한 정사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벨린은 무엇도 내색하지 않은 채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전하께서 싫다시는 데 제가 별수 있을까요?”

    그 와중에, 아까 들었던 질문에 착실하게 답까지 내놓으면서.

    “정성이군. 그러게 애초에 파르디타가 내미는 손을 잡지 않고.”

    “저도 그러고 싶긴 한데, 지금은 좀… 관계를 개선하기가 그래요. 제게 화가 잔뜩 나셨거든요.”

    “그럴 만하지. 넌 건방지고, 괘씸한 계집이니까.”

    “제 가치를 잘 쳐줄 사람이 그만큼 드문 것을 어떻게 해요. 저는 몇 년씩 연애 놀음으로 허비할 시간이 없어요. 지금 당장 절 원할 사람이 필요하고요.”

    “아하…. 그래서 재취 자리도 마다 않겠다?”

    이벨린은 활짝 웃었다.

    “조건만 잘 맞는다면요. 그때까지는 전하께서도 제 가치를 지켜 주시기로 약조하신 것은 잊으시면 안 되고요.”

    테이블 너머로 그의 아래가 불룩 치미는 것이 보였다. 그는 심지어 제 발정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이벨린은 무엇도 못 본 척 시선을 들었다. 아무리 카스트로가 엘레나를 닮은 것에 욕정을 느낀다고 하나 그는 정도가 너무 심했다.

    뚫어져라 봐서도, 활짝 웃어서도 안 된다니…. 이벨린은 당혹을 감추려 찻잔을 들어 올렸다. 안의 내용물은 마시지 않은 채로 잔만 기울이는 시늉을 했다.

    이윽고 그가 물었다.

    “그 남자를 대체 어떻게 설득했기에 널 모른단 대답이 나왔지?”

    “그 남자요?”

    “브리타냐에서 온 남자. 파르디타가 데려온.”

    “또 그 말씀…. 저는 무엇도 속인 적 없어요.”

    “지루하긴. 흥미가 떨어져.”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믿기 힘든 이야기잖아요. 그 남자의 아버지 되는 윈스포드 시장께서 얼마나 탐욕스러운 자인데… 전하께서도 아실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런 남자에게 평민 출신 약혼녀라니 말도 안 되고요.”

    카스트로가 픽 웃음을 물었다.

    “그렇게 부정해대니 더 수상하긴 한데, 난 네가 평민 출신 계집이라고 해도 이젠 별 상관없어. 역대 황제의 총희 중에 더 비천한 출신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아, 전하께서 그런 취향이신 줄은 미처 몰랐네요.”

    “그 되바라진 성격은 죽여. 엘레나는 그러지 않았으니까.”

    “…….”

    그야, 그렇겠지. 그때는 차라리 숨 쉬는 시체에 가까웠으니까. 그녀는 종종 제게 덤처럼 주어진 이 몇 달간의 삶이, 엘레나의 평생보다 몇 배는 더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물론, 무엇도 밖으로 드러낼 순 없는 감정이었다.

    갑자기 입을 다문 이벨린의 태도에 카스트로가 달래듯 덧붙였다.

    “내 말은, 조금 더 고상하게 굴란 소리야. 네가….”

    “황태자 전하.”

    시종이 고하는 소리에 말이 끊기자, 카스트로가 신경질적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황태자의 날 선 반응에 머뭇거리면서도 성실히 고했다.

    “안드라데 공작이 전하를 뵙길 청합니다.”

    “돌려보내.”

    “하오나, 시급한 용건이시라고….”

    “돌려보내란 말 못 들었나?”

    “전하. 저 때문이라면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이벨린은 테이블 너머로 살짝 손을 뻗어 그를 만류했다.

    “저는 조금 기다려도 상관없어요.”

    “…….”

    “아니면 다음에 불러 주실 때 다시 와도 괜찮고요.”

    이건 반쯤 도박이었다. 그녀는 간절하지 않은 척, 오히려 조금 지루하다는 양 시선을 갈무리했다. 그 모습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던 카스트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안드라데 공작은 결혼한 사람이야.”

    “정말, 저를 무엇으로 보시고.”

    “재취 자리를 노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뭐, 아니라면 됐어.”

    황태자가 시종더러 들여보내라는 손짓을 하자, 이윽고 안드라데 공작이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넙데데한 얼굴에 불쾌한 웃음이 가득했다. 그는 황태자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곤, 곧장 이벨린에게도 알은체를 했다.

    “황태자 전하. 아, 레녹스 백작 영애께서도 함께 계셨군요.”

    이벨린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라데 공작 각하.”

    “환담을 나누시는 데 이 늙은이가 방해가 되었나이까?”

    “그럴 리가요. 중요한 용건이신 것 같은데 마땅히 제가 자리를 비켜드려야죠. 전하, 저는 서재에 있을게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사뿐한 걸음으로 곁방의 서재로 옮겼다. 그녀는 문을 조용히 안쪽에서 걸어 잠갔다. 다행스럽게도 황태자와 안드라데 공작은 금세 저들끼리의 대화에 심취해, 그 조용한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야.’

    심지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일부러 안드라데 공작의 알현 시간을 골라, 그때까지 황태자의 집무실에서 시간을 죽인 보람이 있었다. 평균적으로 공작의 ‘알현’은 15분 남짓이었다. 이벨린은 조금 서두르기로 했다.

    ‘2년 전과 사소한 배치가 바뀌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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