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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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부터 온 수도의 일간지가 ‘이벨린 로즈 레녹스’를 시끄럽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2황자와 황태자 사이를 이간질한 희대의 악녀로, 혹은 권력의 가련한 희생양으로, 마녀나 창녀로….

    단테와 루카스는 당연히 경악했으나, 엔리케와 이미 합의한 내용이라는 사실에 떨떠름하게 물러섰다.

    그 와중에 단테는 비센테 전하께서 끝까지 모르시길 빌라는 악담을 퍼붓긴 했지만….

    그마저도 저를 아끼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 온전히 미워할 수만도 없었다.

    이벨린은 카스트로의 집무실로 곧장 통하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오늘따라 머릿속이 무너진 케이크 반죽처럼 흐물거렸다.

    아무래도 열이 다시 오르기 시작한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일정을 다 취소하고 쉬고 싶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카터와 약속했던 그 밤으로부터 벌써 이틀이 지났으니까….

    이벨린이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을 때, 안쪽으로부터 문이 급작스럽게 열렸다.

    “…아.”

    어둑한 집무실 안에서 빠져나온 것은 아멜리아였다. 그건 꽤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날 생각밖에 없었는지, 흐트러진 의복이며 머리카락을 미처 정돈하지도 못한 채였다. 조급하게 서두르던 발걸음이 문 앞에 서 있던 이벨린을 보고 나서야 딱 멎었다.

    그 순간, 아멜리아의 얼굴에 어린 것은 다 감추지도 못할 수치심이었다.

    “…….”

    아멜리아의 등 뒤에 마귀의 입처럼 열려 있는 문 너머로 어둑한 집무실이 보였다. 커튼이 쳐진 탓에 사물과 사람조차 분간이 어려웠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순간, 아멜리아가 성급하게 문을 닫았다. 그 바람에 집무실 안에 고여 있던 비릿한 정사의 향이 그들의 얼굴로 훅 끼쳤다.

    여자의 말간 뺨이 더 달아오를 수 없을 정도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레녹스 백작 영애.”

    궁지에 잔뜩 몰린 얼굴을 하고도, 예법대로 무릎을 굽혔다 펴는 행동은 지극히 우아했다. 두 번 돌아보지도 않고 옮기는 걸음이 바빴다. 이벨린은 그대로 저를 지나치려던 아멜리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거의 반사적으로.

    “…….”

    그녀의 무례를 질책하는 듯한 시선이 바로 꽂혔다. 피로에 젖은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아멜리아가 가칠한 입술을 열었다.

    “제게 볼일이 있으신가요?”

    “전하께서는 안에 계신가요?”

    “…….”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이 시간에 뵙기로 약속했거든요.”

    물론 ‘어제’도 카스트로는 반쯤 약에 취해 있었고, 그녀의 진짜 목적은 카스트로가 아니라 황태자의 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시종들과 안면을 터 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적은 제 발로 이 궁을 드나든 지 고작 이틀 만에 다 이루어졌다.

    황태자의 집무실까지 가는 동안 누구도 그녀를 막아서지 않았으니까.

    시종들에게 넉넉히 뿌린 돈과 근래 황태자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다는 후광, 심지어 그 황태자가 손수 집무실의 문을 열어 주는 것을 목도한 시종들은 ‘조용한 것을 원하신다’는 그녀의 한마디에 잡일을 하는 하녀들마저 물렸다.

    그 결과로 복도는 이렇게나 고요했다.

    ‘물론 비밀 금고를 믿고 이렇게들 안일하게 구는 거겠지만. 모르는 사람은 온종일 수색해도 못 찾아낼 테니까….’

    성과를 확인했으니 홀가분하게 떠나도 좋았을 것을, 여태 아멜리아를 붙잡고 머뭇대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아멜리아 때문이다.

    며칠 전 메리를 통해 은밀히 알아보았던 속사정이 못내 거슬려서.

    “아가씨께서 말씀하셨던 그 시녀분 말이에요. 소문에는 어머니가 많이 아픈 모양이더라고요. 약값도 만만찮은데 군식구도 몇이나 달려 있다고 하고….”

    “약혼자는?”

    “알아봤는데, 진작 갈라선 모양이에요.”

    “…헤어졌다고?”

    “남자 입장에선 약혼을 유지할 이유가 없잖아요. 카스타야 영애께서 살아 계셨다면 모를까, 바르코라면 애초부터 몰락 직전의 가문이고.”

    “마테오… 아니, 그 남자가 그걸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한때는 칼을 들고 죽네 사네 했던 모양이지만, 아가씨도 보셨다시피 황태자 전하께서 거의 전시하듯… 그러신다잖아요. 그 뒤론 파혼에 동의하고 가문의 영지에 틀어박힌 모양이에요.”

    그 시절, 그녀는 아멜리아와 마테오가 얼마나 서로를 애틋하게 여겼는지를 알았다. 아예 본 적이 없다면 모를까 그 기억이 여태 밟혀서, 정말 쓸데없고 무의미한 감상이라는 건 알지만….

    “아픕니다, 레녹스 백작 영애.”

    “아, 미안해요….”

    생각에 잠긴 사이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던 모양이었다. 말로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놓아줄 생각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이는 뻔뻔한 낯에 아멜리아가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미안하시면 이 손부터 놓으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시면 도망가실 듯해서요. 죄송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했네요. 음… 그러니까, 제가 드리려던 말씀은, 만약 전하께서 안에 계시면 말씀을 대신 아뢰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아직 집무실 안까지는 함부로 드나들 수가 없어서요.”

    아멜리아는 구구절절 늘어지는 이벨린의 말을 겨우 인내했다는 듯, 말이 끝나자마자 딱 잘라 대답했다.

    “전하께선 지금은 주무시고 계세요. 중간에 깨지 못하실 테니, 무슨 약속을 영애와 하셨든 지키기 어려우실 겁니다.”

    “그러면 언제쯤 다시 오면 될까요?”

    “길면 내일 오전, 짧아도 서너 시간 뒤에나 깨어나실 터라… 제가 확답드릴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아멜리아가 이벨린의 손목을 잡고 제게서 떼어 내려고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만….”

    더 물어볼 것이 없으면 제발 이만 좀 놓아 달라는 투였다. 이벨린은 조금 더 뻔뻔하게 웃었다.

    “정말 죄송한데, 그러면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

    “황태자 궁 내에도 작은 장서관이 있다고 들어서요. 혹시 그곳까지 안내해 주실 수 있으세요? 어디가 어디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복도 바깥으로 나가셔서 아무 하녀나 붙잡고 물어보기만 하셔도 될 텐데요.”

    “제가 낯가림이 심해서 간청드리는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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